"존경을 받기 어렵거든 차라리 공포의 대상이 되어라."
"인간들이란 다정하게 대해주거나 아니면 아주 짓밟아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사소한 피해에 대해서는 복수하려 들지만, 엄청난 피해에 대해서는 복수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 마키아밸리 <군주론> 중 -
입사하자마자 그가 나에게 포식자의 면모를 보인 것은 아니었다. 또한 평소는 너무나 정상적인 사람이자 내가 좋아하던 형이기도 했다. 회사 적응기간 동안에 일은 고됐어도 사람으로 힘들지는 않았다. 포식자의 등골 오싹한 하울링과 날카로운 이빨은 예상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들이닥쳤다.
내가 하던 업무에서 변수는 항상 존재했고 그 안에 위험은 항상 도사리고 있었다. 그 위험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순간, 포식자는 선한 모습을 지우고 날 선 위협 태세를 갖추어 나를 대했다. 경험이 부족해서, 디테일이 부족해서, 실수로, 역량이 떨어져서, 어떤 이유에서든지 사건과 사고가 발생하면 대표는 매우 예민해졌다. 벌겋게 부어오른 얼굴과 한숨에서부터 그가 지금 꽤나 화가 나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대표는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또는 전 회사원이 있는 단톡방에서 사건의 정황들을 적나라하게 밝히고, 발생 원인에 대해 파헤쳤다. 한 마디로 사건을 초래한 장본인을 출색했다. 어느 누가 되었건 '죄송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사건의 경위를 설명하더라도 그의 거친 피드백은 멈추지 않았다. 무슨 생각으로 이딴 식으로 일을 했냐, 네가 다 책임져라, 회사원이라면 충분히 들을 수 있는 피드백이었지만, 말의 뉘앙스가 매우 매섭고 추궁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 그 자리에는 당사자뿐만이 아니라 회사 전 직원이 그 광경을 목격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수치심이 차오르기에는 충분했다.
혹여나 사건의 개요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조금이라도 부정해 버리면, 더 큰 화를 불렀다. 어떻게 해서든 집요하게 꼬투리를 잡았다. 증거를 수집하고 상대방을 강하게 압박했다. 멘털이 강한 그 어떤 누구라도 그의 압박을 마주하면 나오려던 말도 나오지 않고, 머릿속은 새하얗게 변해 논리를 잃었다. 가끔씩 대표의 지적과 질책이 대표의 오해에서 시작되었다 할지라도, 그가 지닌 권력은 오해 또한 팩트로 변모시키기도 했다.
그의 갑작스럽고 충동적이며 감정적인 모습은 회사 사람들 중 나에게 가장 많이 표출되었다. 앞으로 회사를 이끌고 갈 사람이라는 명분 아래, 나는 더욱더 혹독한 상황을 견뎌야 했다. 그러기를 몇 개월을 반복했을까. 상당한 부작용이 발생했다.
일을 잘 해내기 위해서 일하는 게 아니라, 그의 포악함이 나에게 미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일을 했다. 그가 나를 대하는 태도는,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이성적인 모습이 아니라, 오로지 나를 찍어 내리기 위한 모습이었다. 자신의 권위적인 모습을 강화하고 위계질서를 명확하게 구분 짓기 위한 행동이었다. 수치심보다도 더욱 힘들었던 것은 회사를 계속 다니는 한 이 시간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했지만 너무나도 뻔했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나는 최악의 선택을 했다. '변명거리를 찾자', '내 잘못을 최소화하고 남의 잘못을 강조하자.' 공포에 절여진 내가 생존하기 위해 벌인 짓은, 나의 잘못을 위장막으로 숨기는 것이었다.
변명은 꽤나 교묘했지만, 그의 철두철미하고 예리한 레이더에서 벗어나지 못해 오히려 더욱 큰 화를 부른 적도 많았다. 다신 변명하지 않겠노라 그의 앞에서 다짐해도, 또다시 그의 앞에서 겪을 일들을 생각하면 식은땀과 가슴의 두근거림부터 몰려왔다. 불길한 예상이 현실이 되었을 때, 나는 또다시 얼버부리며 변명할 거리들을 찾고 있었다.
나는 대표의 감정 섞인 격앙에 대해서 복수를 할 생각은 단연코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는 내가 복수할 엄두도 내지 못하게, 강하게 짓밟는 것에 굉장히 능통했다. 평소엔 그저 평범한 한 사람이었을지라도, 일을 대하는 데 있어서는 자신이 존경받는 것 대신에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을 택했다. 그런 자신의 행동을 통해 직원들이 더욱더 일을 진지하게 대할 것이라 믿었다. 그는 단순히 본능대로, 감정이 이끄는 대로 분노를 표출한 것일 뿐만 아니라, 꽤나 계획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통해, 자신이 남에게 행동하는 양식을 정리했던 것이다. 회사가 시간이 흘러 분위기가 바뀌어 가면서 대표의 이러한 생각과 행동도 꽤나 개선되었지만, 이미 나에게 있어서 그의 존재는 범접 불가능한 두려움의 존재로 각인된 후였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당시 대표가 행한 것들의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그 행동에 대한 나의 비겁한 행동이다. 나는 겁에 질려, 비겁해지기로 결심했다. 공포에 억눌려 제대로 된 문제 인식을 거부했다. 변명을 일삼고 회피할 거리를 찾았다. 잠시나마 썩은 내를 흙으로 덮어본들, 덮어둔 흙마저도 결국엔 썩기 마련이었다. 나는 일을 제대로 수습하지 않았고 더 큰 화를 초래했다. 나의 이러한 행동의 근원이 그 당시 대표에게 있다고 할지라도, 결국에 나를 더욱더 공포와 불안의 구렁텅이로 밀어붙인 것은 순전히 나 자신이었다.
지금의 대표는 그때 당시의 대표처럼 포악하게 굴거나 감정을 못 이기는 사람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나의 뇌는 과거의 학습된 그대로를 또다시 수행하고 있었다. 대표에게 사건을 보고하기 전에 빠져나갈 구멍부터 찾고 있었다. 어쩌면 이 사람도 아직 잠재되어 있는 감정 분출의 트리거가 당겨지지 않았을 뿐, 결국엔 똑같을 것이란 허상을 만들고 스스로 공포를 조성했다. 가까스로 이성을 부여잡은 덕분에 변명을 하려던 나의 행동을 급하게 제지했지만, 그가 나에게 묻는 모든 질문들이 나를 향한 질책으로 들리는 것까지 내가 어찌할 수는 없었다. 가슴의 두근거림이 몰려왔다. 숨쉬기가 힘들었다.
이렇게 과거과 현실의 첫 번째 연결고리를 찾아냈다. 극도의 공포심으로 인한 문제 인식 회피와 변명.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내내 씁쓸함과 부끄러움이 밀려왔으나, 한 번 정리하고 나니 꽤나 개운한 기분. 하지만 아직 여전히 끄집어내 정리해야 할 과거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