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인물이나 사건이 현재의 삶에 꽤나 큰 영향력을 가하고 있는가? 그래서 동일 인물, 동일 사건이 아닐지라도 비슷한 인물이나 상황이 눈앞에 놓일 때 심각한 심리적 불안에 휘둘려, 심하면 소변까지도 지릴 수 있는 상황을 겪은 적이 있는가? 물론, 아직 나 또한 오줌까지 지려본 적은 없다. 하지만 그와 동등한 심리적 불안에 휩싸였기 때문에 약을 복용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특히, 나의 경우에는 과거의 인물들이 그 트라우마의 원인임이 이번 사건으로 인해 확실하게 밝혀졌다고 볼 수 있다. 과거와 동일한 인물이 아닐지라도, 과거의 그 인물과 성격이 매우 극과 극일 지라도, '비슷한 위계의 권력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라면, 내가 겪었던 동일한 불안감은 언제든 발현될 수 있다.
23년 말, 다시는 들어갈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초기 스타트업에 입사했다. 일면식도 모르던 회사 대표는 내가 링크드인에 올려놓은 이력서를 관심 있게 보고 뜻밖의 제안을 해왔다. 회사에 필요한 인재라고 여겼는지, 당장은 회사 운영상 많은 보수를 주지 못하지만, 회사가 정상적인 이륙 궤도에 올라오는 순간부터는 확실한 보상이 주어질 것임을 약속했다. 꽤나 익숙한 기시감에 이끌려 입사를 택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나는 이미 과거에도 초기 스타트업의 제안을 받고 5년씩이나 근무를 했었으니 말이다.
낯선 회사에 적응하는 일은 이미 10년 가까이 사회생활을 이어온 나에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 한 가지만큼은 내가 본능적으로 또한 의식적으로도 계속해서 경계하고 살펴보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대표의 성향과 태도였다. 다행히 대표에 대한 자가 진단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내가 충분히 오너로서 모실 수 있고 배울 점이 많은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모든 업무에 대한 적응과 경험이 꽤나 능숙하게 이뤄지고 있을 즈음, 내가 정신과 약을 먹게 된 사건이 드디어 발발했다.(이 일에 대한 간략한 내용은 전편 6화에 있다.)
일이 터지고 나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당연히 대표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의자에서 박차고 일어나 곧바로 대표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는 순간, 내 등줄기에는 식은땀과 피부의 미세한 떨림이 뒤섞여 이름 모를 위화감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평소처럼, 대표에게 상황을 보고하러 가는 것일 뿐이었다. 하지만 다리는 무겁게 경련이 일어나고 있었다. 손은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서로 맞잡아 비벼대거나, 머리를 쓰다듬거나, 얼굴을 쓸어내리는 등 어떻게라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싶어 했다. 약 열 걸음도 채 안 되는 동안, 시간의 왜곡은 너무나 압도적으로 내 눈앞에 놓였다. 왜곡이 이뤄질 동안 머릿속에서는 형체를 알아차릴 수 없는 무수한 필름들이 뒤섞여 어지럼증을 유발했다.
마침내 대표의 앞에 섰지만, 제대로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이마로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한 번 닦아내고, 등 뒤로 쌓이는 축축한 땀을 말리려 윗옷 뒷단을 잡아 펄럭였다. 입은 입대로 따로 놀아 버벅거리며 상황을 제대로 말할 수 없었다. 가까스로 현실을 깨닫고 벌어진 상황을 육하원칙으로 정리해 명확하게 말하려는 때에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상황이 아니라 '변명거리'를 쏟아내고야 말았다. 내가 일으킨 문제는 쏙 빼놓고 대표에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사고가 벌어진 경위 중 내 잘못 몇 줄을 머릿속에서 삭제시키고 있었다. 나의 뇌가 이 사실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순식간에 벌어진 일. 여느 때와 다른 다급함과 조급함, 그리고 긴장의 쩐내가 감도는 나의 모습에 무언가 감추는 게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대표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대표는 차분하고 조리 있는 말투로 상황을 다시 처음부터 조목조목 말해주기를 바라며 되물었다. 내가 나를 감추기 위해 온갖 것들을 다 토해낼 즈음의 되물음이었다. 또한 겨우겨우 내 뇌가 나의 나약한 무의식을 알아챘을 즈음의 되물음이었다. 내가 그 상황에서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모든 상황을 투명하고 서스름 없이, 비록 나의 과오가 함께 밝혀지게 되어 욕을 먹게 되더라도, 이 악 물고 모든 사실을 토해내는 것이었다.
여기까지가, 내가 약을 복용하게 된 현재의 진실이다. 변명과 사실을 감추는 행태로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찰나동안의 고립뿐임을 이때 당시 나는 다행히도 늦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렇게나 빠른 현실 자각은 과거의 인물과는 확연하게 상반된 현재 대표의 나를 대하는 태도 덕분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과거의 나는 이 고립을 택했다. 아니 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 아닌 변명으로서 과거를 시작해보려 한다. 내가 그 당시 대표, 최상위 포식자에게서 벗어나고자, 아주 잠깐이나마 숨어서 숨만이라도 고르기 위해 땅굴 속으로 몸을 숨겨 나 자신을 고립시키던 그 시절. 공황장애에 걸렸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그 시절. 내가 숨 쉬던 모든 곳이 포식자의 영역이었던 그때로 돌아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