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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y Sep 17. 2024

아침 9시, 정신과 환자 30명

서랍 구석에 처박아 둔 정신과 약을 다시 꺼내야 했다. 계기는 상당히 의외의 상황에서 일어났다. 내가 저지른 일들이 회사 대표 덕분에 거의 다 정리되어 가고, 위기일 줄 알았던 것들이 오히려 기회로 바뀌면서 회사는 급격히 바빠지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내가 해야 할 일들도 늘어났다. 초여름의 열기가 서서히 무르익어 가는 아침 날, 대표의 호출로 급하게 시작된 회의. 출근시간 1분 남짓한 상황,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조급하게 기다리던 내 등에는 더위 때문인지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사무실이 위치한 6층에 엘리베이터가 다다르자마자 경쾌한 발걸음으로 사무실 현관을 열고 회의실로 곧장 향했다. 의자에 앉자마자 대표는 회의를 시작했다.

  대표의 일을 향한 열기는 폭염을 기록한 올해 여름보다 더 뜨겁다고 자부하는데, 이 날도 그러했다. 그래서일까 대표의 열의에 찬 일장연설이 계속될 때마다 출근길에 흘렸던 식은땀이 식어가지 못하고 더욱 힘차게 땀샘에서 샘솟기 시작했다. 갑자기 찾아온 여름 더위와 대표가 뿜어대는 열기가 더해져서 그럴 것이라 단정한 채 노트북만 뚫어져라 쳐다봤으나, 서서히 내 시야 속에 모든 것들이 초점을 잃어가고 있었다. 눈을 비비적거려도 똑같았다. 순간 나의 몸에 이상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땀이 줄줄 흐르는 이유는 초여름 갑작스러운 더위나 대표의 열정 때문이 아니었다. 내 심장이 수없이 두근대는 바람에 일어나는 현상들임이 분명했다. 

 한 시간가량의 회의를 겨우겨우 버텨내고, 과호흡으로 이산화탄소가 가득한 회의실을 나왔다. 긴장이 완화되기는커녕 머리에 맺힌 땀들이 송골송골 더 커지더니 이마로 흐르기 시작했다. 시원한 물을 마셔도 심장의 요동은 멈출 줄을 몰랐다. 호흡은 더욱 심하게 가빠졌다. 팀원들에게 내색하고 싶지 않았다. 내 몸이 이상하다는 것을, 나는 지금 정상이 아님을 그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도 앞선 것은 '살아야겠다'라는 본능이었다. 

 곧장 대표에게 말해 연차를 썼다. 출근하자마자 퇴근한 꼴이었다. 곧장 택시를 불렀다. 지하철을 타는 것은 나에게 큰 에너지 소모를 요구할 일이었다. 내가 정상적인 상황이 아님을 기사님도 알아챘는지 곧바로 에어컨을 끄고 양옆의 창문을 열어주었다. 신선한 바람이 몸 안으로 들어와 내 호흡을 조금이나마 부여잡고 있어서였는지, 집으로 가는 길이 잠시동안은 괴롭지 않았다. 집에 도착하자 내팽개 처두었던 약을 찼았다. 괜히 심각해져서, 굳이 떨어도 되지 않을 손을 떨어가며 약봉지를 뜯고 약을 허겁지겁 삼켜댔다. 나에게 굳이 약이라는 존재가 필요하지 않다고 마음속으로 호언장담하던 날부터 딱 7일 후의 일이다. 




또다시 약기운이 나의 모든 것들을 공평하게 내 안에서 밀어냈다. 나의 머릿속을 무(無)로 만들어 무기력을 이뤄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회사가 아닌 병원으로 갈 채비를 마쳤다. 아직 나에게는 지난번 받은 약봉지가 여전히 풍요로웠지만, 나는 병원으로 향했다. AI보다 더 AI 같았던 의사 양반이 한 시간도 안 돼서 처방한 내 증상의 원인을 믿을 수 없었다. 의사에게서 받아 온 500가지 이상의 낯설고 이상한 질문이 가득한 설문지의 분석 결과가 나에게는 꽤나 절실했다. 

 설문지는 온전히 나의 머릿속이 무(無)로 가득했을 때 작성한 설문지였다. 약을 처음으로 복용하고 머릿속을 약기운으로 압도당할 동안 적었던 설문지였다. 그렇기에 모든 질문을 선택하는 기준에는 뜨거운 감정보다는 차가운 이성이 자리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살아야겠다.', '살고 싶다'라는 바람과 함께 7일 전 내가 안도감에 충만해지면서 들었던 모든 생각이 병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에 짓눌리고 있었다. 


'현재의 나는 절대 평범하지 않다.'

'나는 약에 기대야 하는 나약한 인간이구나.'

'정상적인 삶을 바라는 것이 아직은 나에게 사치구나.'

'내가 지니고 있는 불안함이 나를 죽일 수도 있겠구나.'


세상 모든 염세를 기꺼이 품을 기세를 안고, 나는 서서히 병원에 다다르고 있었다. 1층, 2층, 3층, 병원이 위치한 4층, 드디어 세상 모든 절망스러움이 내 무의식 깊이 박혔다고 비관하며 병원문을 여는 순간.


그곳은 아수라였다. 


평일 아침 9시. 여느 때와 다름없이 기계화된 패턴대로 출근길에 올라야 할 사람들이 지하철, 버스 속에 한가득이어야 할 시간. 정신과를 들르는 것마저도 사치가 되고, 일터에서 얻는 불안과 우울은 이제는 정상인의 범주에 속하는 평범한 현상이라 생각했던 현재. 삭막한 빌딩 속에 자신의 몸을 내팽겨 쳤어야 할 도시에 찌든 이들이 최소한의 생명줄을 부여잡고 병원이라는 도피처에서 대기 중이었다. 


어림짐작으로 그 수를 세어봐도 서른 명 이상.


그들은 다들 각자의 사연과  각기 다른 사건들을 겪고 병원을 찾았을 것이다. 그들은 나와 마찬가지로 이 병원의 AI 스러운 의사에게 첫 진찰을 받았으나 자신의 증세를 뿌리 뽑지 못하고 약기운에 압도되어 이미 수차례 병원을 방문한 이들로 보였다. 

 어차피 이 날 서른 명이나 되는 대기줄을 뚫고 진료를 받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는 한동안 병원 현관 유리문을 열지 않고 내 시야에 보이는 모든 풍경을 세세하게 담았다. 너무나 실례되는 말이지만, 내 눈에 들어온 그들 덕분에 나는 순간 용기를 끌어올릴 수 있었다. 온갖 염세가 내 육신을 차지하게 내버려 두었던 나 자신에게 상대적 안도감이 들었다. 병원 문을 열고 간호사에게 설문지를 제출하려 한 발자국 씩 다가갈 때마다, 내 머릿속에 자리했던 번뇌들이 조금씩 그들에게 압도되었다. 간호사들이 위치한 데스크까지는 약 10걸음.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면서 내 주변에 자리한 모든 이들을 목격할 때마다, 발걸음은 가벼워지고 두려움이 용기로 조금씩 바뀌어 갔다. 마침내 설문지를 제출하고 병원 밖을 나가는 마지막 발걸음. 내가 병원을 방문했는지도 모를 만큼, 그들의 움직임과 눈빛은 총기를 잃어 있었고, 시종일관 그들의 머릿속 세계에 짓눌린 듯 보였다. 




설문지 분석 결과에서도 내 진단은 달라지진 않았다. AI보다 더욱 AI 같은 의사의 진단은 그 결과 또한 AI보다 더욱 AI 스러웠던 것일까. 하나 나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날 그들의 모습을 목격한 이후, 나는 약을 주기적으로 복용해 보기로 자그마한 용기를 냈다. 그와 동시에 진심으로, 열과 성의를 다하여 나를 인정했다. 지난번 병원을 들를 때와 비슷할 수도 있겠으나, 전혀 다른 마음가짐.


'나는 지금 정상이 아니다.'

'나는 지금 나약하다.'

'약은 해결책이 아니다. 임시방편일 뿐이다.'

'불안? 우울? 없앨 수 없다. 그들 또한 나의 일부이다.'



 내가 느끼는 불안보다 더욱 심한 불안, 내가 겪는 고통보다 더욱 큰 고통, 내가 감내해 왔던 쓰라림보다 더욱 깊은 쓰라림, 내가 처한 상황보다 더욱 비관적인 상황. 이 따위 것들이 나에게 위로와 안도감을 제공해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해보지 못했다. 군대도 자대가 제일 힘들듯, 사람도 자신이 처한 상황이 제일 딱하다고만 생각해 왔고, 그게 팩트라고 확신해 왔다.

간과했다.

내가 자리한 심연 또한 다른 이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자신의 과거를 현재와 분리하지도 못하는 사회의 부적응자라 나 자신에게 주홍글씨를 새기려 했다. 그런 나에게 평일 아침 9시, 서울의 한 정신과 대기실의 풍경은, 역설적이게도 나에게 있어서 세상을 제대로 인지하고 나라는 사람의 나약함을 제대로 인정하기 시작한 아수라장이었다.



밝은 빛이 만연한 곳에는 어둠이 뿌리내릴 수 없으나, 

어둠보다 어두운 심연 속에서 어둠이 빛이 될 수도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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