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dy Sep 10. 2024

난생처음 정신과 약을 복용한 건에 대하여

난생처음 정신의학과의 문을 두드리고 AI보다 더 AI 같은 의사와의 무미건조한 시간을 마무리한 후, 곧장 약국으로 향했다. '과연 나의 증상을 명확히 판단했을까?' 의심이 곤두선 상황 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약을 복용하는 것이 전부였다. 1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내 몇 년의 삶을 정리한 의사의 진단.  그 진단을 반영한 빳빳한 처방전 한 장. 처방전에 쓰인 글자대로의 알약들이 알록달록 비닐 속에 갇혀있다. 잠재된 위력을 헤아릴 수 없는 알약 봉지와 처방전을 교환하는 것이 과연 나를 위한 등가 교환의 행위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상상했던 것보다 기분이 더 더러웠다. 내가 나를 외면하지 않기 위해, 나를 보듬고 위로하기 위해 선택한 행위가 오히려 나를 더 외면하는 행위임을 온몸으로 느끼는 순간. 내 손에 쥐어진 알약 네 알갱이가 내 혀끝을 지나 물과 함께 목구멍을 타고 위액에 서서히 녹여져 내 신경계를 타고 온몸 구석구석에 퍼질 때 즈음, 내 몸에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를 괴롭혀온 심장의 두근거림과 뇌 속에 파고든 온갖 잡생각을 강력한 약기운이 벼랑 끝으로 몰아세워 어둠 저 너머로 떨어뜨리려 애쓰고 있는 와중에, 그것이 내몬 것은 이들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나로서 존재하기 위한 온전한 정신을 약기운은 구분해 낼 능력이 없었다. 아니 구분해내려 하지 않았다. 불안과 우울 그리고 이외에도 나를 괴롭히던 여러 증상들을 나 혼자만의 힘으로 오롯이 떨쳐내기가 어려워 택한 지원군은 나의 우군이 아니었다. 그는 모두에게 공평했다. 그가 무력으로 밀쳐내려던 내 정신 속에 어떤 존재가 있었는지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역할은 그 자리를 무(無)의 자리로 만드는 일이었다. 불안과 우울 그리고 내 온전함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무(無)가 자리했고, 무기력함으로 말미암아 그날 하루 나는 침대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나를 괴롭혀오던 불안스러운 심장박동과 고통스러운 지끈거림을 잃고, 나 또한 잃어버린 하루.



의사에게서 처방받은 일주일치 약봉지에서 딱 하루분인 두 봉지 분량을 각각 점심과 자기 전에 복용하고 나서 남은 약은 서랍에 처박아두었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기분. 내가 떨쳐내고 싶었던 불안과 우울을 힘껏 떨쳐냄과 동시에 나 자신을 적극적으로 외면하는 행위. 더 이상 내가 나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껍데기만 덩그러니 남아있고 속은 공허로 가득한 존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다행인지 아닌지 모를 일이었지만, 회사에서 내가 벌인 일(지금의 사태를 초래한 일)들이 조금씩 '남의 손'에 의해서 수습이 되어갔다. 약에 기대지 않더라도 회사의 위기가 잔잔한 기회로 바뀌어 가고 있음에, 빼앗겼던 평범한 일상을 돌려받고 내 심신이 안정감을 되찾아 가는 것만 같았다. 내 증상을 약에 기대어서라도 치유해 보려 부여잡아본 선택이 꽤나 더러운 기분이라는 것을 느껴본 나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안도감이 몰려왔다.


난 아직 약에 기대지 않아도 되는구나, 

정상적인 삶을 느낄 수 있는 탄력성이 나에게 여전히 남이 있구나, 

난 나약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가 가질 수 있는, 나를 보호하기 위한 불안함을 가지고 있는 것일 뿐이구나.


내가 머물러 있는 곳이 안락함을 가장한 태풍의 눈 한가운데임을 전혀 알지 모른 채.

이전 03화 난생처음 정신과에 찾아간 건에 대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