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사람과의 관계에서 갈등이 있을 때, 고객과 접점이 있는 일들을 해내야 할 때, 그리고 기본적인 인격적 소양을 키우는 경우에 우리는 역지사지를 들먹인다. 그것도 아주 자주말이다. 어릴 적 부모님 이하 모든 어른들, 학교, 교양서, TV, 어떤 곳이든지 들먹이지 않는 곳이 없고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없을 정도니까.
하지만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들먹이면 들먹인 수록 어렵다. 오죽하면 연인 사이에서는 '네가 내 입장에서 생각해 봤어?', '한 번이라도 내 생각해 본 적 있어?'라는 식으로 역지사지의 모습아 상당히 공격적으로 표출되며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는 역지사지를 목이 터져라 다른 이들에게 떠들어대지만 세상이란 모진 용매에 우리의 목소리는 힘 없이 희석될 뿐이다.
역지사지는 불가능할지 모른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불가능은 아니더라도 실천하기가 극히 어려운 것만큼은 자명하다. 왜냐면 결국 나는'내가 아닌 누군가'가 되어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역지사지의 사전적 정의는 '처지를 바꾸어 생각함'이다. 처지를 바꾸어 생각해 보는 것은 내가 상대방이 되어 봤을 때 일어날 가상의 현실을 상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우린 이미 삶에 부단히 부대껴 왔다보니 그동안 쌓아온 삶의 철학,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론과 경험칙은 너무도 굳건한 시스템이 되어 버렸다. 타인이 되어 가상의 현실을 상상하는 것은 가능할지 몰라도 '상대'의 입장까지 헤아려가며 처지를 생각하기엔 마음이 굶어있다.
역지사지의 핵심은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는 데 있지 않다. 내 입장에서 상대의 상황을 이해해 보는 수준에서 그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여기까진 잘 되지만 그 이상 진척되지 않는다. 진정한 역지사지는 그 사람이 되어 봐야만 가능하니까. 너무 냉소적 일지 모르겠으나 과연 우리는 '내가 아닐 용기'를 가지고 있는가? 만일 그러한 용기를 지녔다 하더라도, 상대를 헤아리려는 그 욕심 또한이 내 이기심에서 발현한, 내가 행복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지는 아닐는지 의심스럽기까지도 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 나도 여전히 그 답을 탐색하고 탐구하는 중이다. 현자의 말을 따라만 한다고 해서 현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알고 있는 듯하다. 역지사지 이전에 나를 제대로 알아가는 것이다. 내가 그 사람이 돼 보지 않는 이상 완벽하게 헤아릴 수는 없다. 만일 알게 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상대방에 대해 쌓아 온 데이터나 직감을 통해 수립하는 가설이자 추론에 불과하다. 그 추정치가 잘 맞아 들어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나 자신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다. 내가 평소에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관찰 카메라를 켜봐도 좋다. 오늘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일기를 써보는 것도 훌륭하다. 남들이 얘기하는 나에 대해서 아무런 필터 없이 수용하지 말되, 그들의 말을 곱씹다가 소화시킬 것은 소화시키고 불순물은 여과할 줄 아는 성숙함은 꽤 얻기 어렵겠지만(나도 여전히 그러하다), 해 버릇하면 나를 알아가는 정말 좋은 방정식이 된다.
자신을 인지하고, 인지한 모습을 인정하고, 또 다른 나의 모습들을 탐색해 나가는 과정을 반복하는 루틴이야말로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가장 기본적인 모습이다. 일정량의 반복 탐색과 인생이라는 실전 투입이 병행될 때, 우리는 보다 더 다른 사람을 잘 헤아릴 수 있다. 이기심이 내재된 그릇된 자만이 아니라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되어 볼 진정한 용기를 가질 수 있다. 이미 나를 알아가는 고독하지만 성숙하고 용감한 여정을 경험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특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