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보면 억울한 일이었다. 초중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만 해도 나는 한국의 교육제도 하에서 성실하게 영어공부를 해 왔고 성적도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늘 그랬듯 수능에서도 1등급을 받았고 단순히 '나는 영어를 좋아하는 편이니까'라는 생각에 영어통번역학과를 선택했다. 하지만 전공 첫 수업에 들어간 순간 내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솔직히 말하면 한순간에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나보다 영어를 못하는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아직도 나와 내 동기는 술만 마시면 서로 자기가 꼴찌였다고 우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압도적으로 꼴찌였는데 지금 내가 통역사라 친구의 기억이 왜곡된 것 같다). 일반계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토익, 토플이라는 시험이 뭔지도 몰랐는데 동기들 중에 토익, 토플 만점자가 아닌 사람을 찾기가 힘들었다. 소위 '국내파'라고 불리던 동기들 역시 가장 낮은 점수가 토익 985점이라고 했다(막 입학했을 때 기준이다).
학생들에게도 종종 이야기하는 에피소드이지만 첫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가자마자 펑펑 울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숙제조차 못 알아들었을 정도였으니. 첫 수업은 원어민 교수님의 수업이었는데 다들 교수님과 아무렇지 않게 농담까지 해 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들 영어를 잘하다 보니 교수님도 수업 난이도를 낮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사이에서 나는 혼자 뻘쭘하게 어쩔 줄 모르고 앉아있었다. 당황한 티가 안 나기를 바라면서. 그래서 나는 그 마음을 안다. 영어 농담에 다들 웃는데 나만 못 웃고 눈치만 살피는 기분.
그동안은 '노력하면 된다'라는 주의로 살아왔으나 이건 노력으로 될 것 같지 않았다. 입학 처음부터 프레젠테이션, 글쓰기, 통역 입문, 번역 입문 등의 수업이 이루어졌고 원어민 교수님 수업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원어민 교수님의 수업이 모두 영어로 이루어진 것은 물론이고 수업 방식도 무조건 토론과 프레젠테이션이었다. 한국어를 쓰면 주의를 받았기 때문에 발영어로 어찌어찌 넘어갔다. 제발 나에게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으면 조마조마하면서 보냈던 시간이었다.
앞서 말했다시피 출발선이 너무 달랐다. 일례로 프레젠테이션 수업에서는 수업 시간마다 각기 다른 주제로 앞에 나가서 영어로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원어민 교수님이 점수를 매기셨는데 내 경우 무조건 수업 전에 글로 스크립트를 작성하고(영어 글쓰기도 못했기 때문에 스크립트도 발영어 천지였을 것이다) 달달 외워서 앞에 나가서 더듬더듬 외운 것을 내뱉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외국 생활을 오래 해서 한국어가 오히려 어눌한 동기는 그런 나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주제와 큰 줄기만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앞에 나가서 프레젠테이션을 하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그렇게 했고 교수님의 폭풍 칭찬을 받았다. 사람들 앞에서 벌벌 떠는 나의 모습을 안타까워해주셨으면 좋았으련만 언제나 내 프레젠테이션 후 교수님은 인상을 잔뜩 쓰셨고 점수도 최하위였다.
나름의 차선책으로 선택한 전공 과목은 글쓰기, 번역 수업이었는데 첫 영한 번역 수업도 잊지 못한다. 과제가 위안부(comfort women)에 관한 것이었는데 나는 그때까지 위안부가 영어로 뭔지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comfort women이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도대체 이게 무슨 단어인지 감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때는 검색 노하우도 없었을 때라서 네이버에 comfort만 찾아보았는데 사전적인 뜻만 보고 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상상력을 한껏 발휘해가며 지금 생각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번역을 제출했고 아니나 다를까 잘못된 번역 사례에 선정되어 모든 동기들이 보는 앞에서 피피티에 소개되었다. 그때의 충격이란.
이런 상황이었으니 영어를 그냥 포기해 버린 게 지금으로써는 당연한 것 같기도 하다. 핑계이기는 하지만 이건 노력으로 메꿀 수 있는 간극이 아닌 것 같았다. 고학년이 되어서는 좋은 학점을 받기도 했지만 작문할 자신이 없어서 그냥 텍스트를 다 외워버리고 그대로 옮겨 썼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실력보다는 노력이나 성실성을 평가해주시는 교수님 수업을 듣기도 했고. 나의 영어 공포증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여전히 누가 영어로 말을 걸까 봐 두려웠고 과제 하나를 하는데도 어마어마한 시간이 걸렸다. 많은 수업에서 영어로 토론 후 앞에서 자기가 속한 조의 토론 내용을 영어로 발표해야 했는 데 제발 발표자로 걸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매시간 공포의 가위바위보(가위바위보로 진 사람이 주로 발표자가 되었다)를 했던 기억이 난다.
자연스럽게도 '나는 왜 영어를 못할까?'라고 자문하게 되었다. 정말로 궁금했다. 반쯤은 화도 났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혹자는 외국에서 오래 살다 오면 당연히 잘하는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내 경험에 따르면 그것도 아니었다(이 이야기는 추후에 다뤄볼 예정이다). '도대체 왜 이지경으로 못하는 걸까'라는 물음만 쌓여간 채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고 대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그때까지도 아무 생각 없이 놀기만 하는 대학생활을 보냈기 때문에 진로에 대한 고민도 전혀 하지 않은 상태였는데 졸업과 동시에 갑자기 진로를 선택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내가 통역대학원에 진학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이 바로 그때였다. 졸업 후 황무지 같은 내 영어 실력을 기반으로 갑자기 영어실력을 쌓아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계속)
김세연 한영 MC·아나운서
국제회의 통역사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내용과 흐름을 정확히 이해하고 전달하는 한영 진행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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