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전함 비스마르크 추격전(1) : 출격, 그리고 바다로

세계 최대의 전함이 모습을 드러내다

by 김휘찬
1_srERzr6A5IZ6TkZ_rRt6ug.jpg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5월 어느 밤, 고텐하펜(Gotenhafen) 항구에서 유려한 실루엣의 함선이 항구를 빠져나가고 있었습니다. 날렵한 외형의 이 군함은 이후 수시간에 걸친 항해를 지속했고, 이후 더 큰 실루엣의 거대한 함선이 이 군함에 합류했습니다. 독일 중순양함 KMS 프린츠 오이겐(Prinz Eugen)이 고텐하펜을 출항한 뒤, 뒤이어 독일 해군의 자랑이자 세계 최대의 전함이었던 KMS 비스마르크(Bismarck)가 이를 뒤따르던 것이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이들의 출격 목표는 바로, 북해와 대서양에서 영국으로 향하는 상선을 격침하는 것이었습니다.

bismarck-prinz03.jpg 중순양함 프린츠 오이겐(좌측)과 전함 비스마르크(우측)의 모습을 재현한 프라모델. (출처:www.modellmarine.de)

사실, 이러한 영국 수송선단을 공격하는 임무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독일은 개전 이래로 U-보트(U-Boat)를 활용하여 영국으로 향하는 수송선을 모두 격침시키고 있었고, 이는 영국의 전쟁수행뿐만 아니라 경제 상황에도 악영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독일 해군 총사령관이자 수상함대 지지자인 '에리히 레더(Erich Raeder)' 제독은, 히틀러에게 수상함대의 필요성을 입증하고 싶어 했습니다. 사실 개전 이후, 너무나도 강력한 영국 해군의 수상함대 전력으로 인해 독일의 함대는 제대로 된 해상작전을 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향후 예산배정에 있어서도 수상함대의 목줄을 죄는 결과를 낳을 수 있었습니다.

Bundesarchiv_Bild_146-1980-128-63,_Erich_Raeder.jpg 전통적인 방식의 수상함대를 지지했던 에리히 레더 제독. 그러나 그의 희망과는 달리, 당시 독일 해군의 수상함대 전력은 암울한 수준이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독일 해군의 비장의 무기, (1941년 기준) 세계 최대의 전함인 '비스마르크'가 중순양함과 함께 대서양의 영국 수송선단을 공격하기 위해 출항한 것이지요. 독일 해군 재건의 상징과도 같은 이 거대한 전함은, 이제 자신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 대서양으로 나아갔습니다. 프린츠 오이겐과 함께 짝을 이루어, 대양에서 영국으로 가는 수송선단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당연하게도, 영국에겐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심각한 위협 중 하나였습니다.


사실 독일 해군 수상함의 '통상파괴전'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1939년 9월 1일을 이미 바다에서 맞이한 도이칠란트급 장갑합 '아트미랄 그라프 쉬페(Admiral Graf Spee)'는, 영국 수송선을 공격하는 통상파괴 임무를 수행하다가 영국 해군과의 교전 이후 우루과이로 후퇴, 이후 자침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지요. 시대를 더 거슬러 올라가 1차 세계대전에서는 경순양함 '엠덴(Emden)'이 혼자서도 인도양 전체의 영국 해운을 마비시키는 전설을 쓰기도 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 해군이 이 수상함 작전에 거는 기대와 그 의미는 매우 남달랐습니다.

graf-spee-large-57c4bf455f9b5855e5fe2cca.jpg 독일의 도이칠란트 장갑함 '아트미랄 그라프 쉬페(Admiral Graf Spee)'의 모습. 작은 함체에 비해 무척이나 거대한 11인치 3연장포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게다가, 이미 독일의 순양전함 '샤른호르스트(Scharnhorst)'와 그 자매함인 '그나이제나우(Gneisenau)'가 협동작전을 통해 이미 한 번의 통상파괴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돌아온지라, 독일 수상함대의 사기는 더욱 올랐습니다. 절대적으로 불리한 전력이었지만, 영국 해군 주력과의 싸움을 회피하면서 최대한 그들을 괴롭혀야 했습니다. 원래는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뿐만 아니라,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도 합류한 총 4대의 작전이 되어야 했지만, 영국 공군의 지속적인 공습 등의 이유로 수리에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작전 개시가 시시각각 다가오는 상황에서, 독일 해군 수뇌부는 어쩔 수 없이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의 2척만으로 작전을 개시하게 된 것이지요.


이 작전을 위해 독일 해군은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먼저 '프린츠 오이겐'과 '비스마르크'로 이뤄진 전대를 지휘할 지휘관으로 '귄터 뤼첸스(Günther Lütjens)' 제독을 임명하였고, 뤼첸스 제독은 뛰어난 지략의 소유자로, 앞서 설명드린 순양전함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의 통상파괴전을 성공시킨 주역이었습니다. 이제 그는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의 2척으로 독일 해군에게 또 다른 빛나는 승리를 안겨주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gunther_lutjens.jpg 프린츠 오이겐과 비스마르크의 2척으로 이뤄진, 새로운 습격함대의 지휘를 맡게 된 귄터 뤼첸스 제독. 매우 깐깐한 성격으로, 주변의 부하들이 많이 불편해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작전 지휘관과 더불어서, 비스마르크의 함장 '에른스트 린데만(Ernst Lindemann)' 대령도 그와 함께 작전을 준비했습니다. 엄하고 깐깐했던 뤼첸스와는 다르게, 부하들을 따뜻하게 대해주어서 인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뤼첸스와의 개인적인 관계는 그리 원만하지 못했다고 하며, 실제로 작전중에도 작전의 수행에 대해서 대립각을 세우는 등의 모습도 보일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린데만은 그 특유의 함포사격술을 바탕으로 이 세계 최대의 전함을 빠르게 장악했고, 부하들과의 관계도 원만하게 함으로써 향후 벌어질 전투를 대비하는 데 성공했다고 보여집니다.

EgcYREwXkAA7lec.jpg 비스마르크의 초대 함장, 에른스트 린데만(Ernst Lindemann) 대령의 모습. 포술에 일가견이 있었으며, 따뜻한 성품으로 부하들에게 인기가 많은 지휘관이었습니다.

이러한 함대 지휘관들의 준비와 더불어, 독일의 U-보트 잠수함대로 보조를 맞출 준비를 시시각각 맞춰나갔습니다. 잠수함대사령관 '카를 되니츠(Karl Dönitz)' 제독은 비스마르크의 이런 대형작전에 발맞추어 대서양에 전개한 U-보트들로 하여금 유사시 즉각적으로 비스마르크를 지원하도록 준비를 마쳤습니다. 전함 비스마르크에는 잠수함대에서 파견된 연락장교도 함께 승선하여, 작전의 수행에 따라서 즉각적인 지원이 가능하도록 연락체계도 구축하였지요.


이제 모든 것이 준비되었습니다. 5월 18일 출항한 이후 항행을 계속하는 프린츠 오이겐과 비스마르크에게, 일련의 구축함들이 합류하였습니다. 이들의 임무는 2척의 함대가 덴마크 해협을 빠져나가 대서양으로 나아가기까지 이를 호위하는 것이었습니다. 덴마크 해협에는 영국 해군이 깔아놓은 기뢰천지였는데, 이들의 호위 아래 소해함대가 기뢰를 해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소해가 완료되자, 야음을 틈타 독일 함대는 덴마크 해협을 돌파하는 데 성공합니다. 영국 해군에게 들키기 않고 좁다란 해협을 통과하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이제 함대는 기수를 돌려 노르웨이로 향했습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영국 함대와 항공기가 바글바글한 영국 해협으로는 갈 수 없기에, 노르웨이 - 아이슬란드 - 대서양으로 향하는 항로를 잡은 것이지요. 노르웨이는 그 중간 기착지로서, 재급유를 비롯한 작전적 보충을 할 예정이었습니다.

fh6q4mwvmw931.jpg 1941년 5월 21일, 노르웨이의 Grimstadfjord에 정박해 있는 비스마르크의 모습. 아직 발트해의 위장도색이 그려져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영국 해군에게 들키지 않았다는 것은 독일 해군의 희망사항이었습니다. 덴마크 해협 인근에서 거대한 전함이 출현한 것을 확인한 스웨덴 해군이 이를 영국에게 알렸고, 영국은 뒤늦게나마 이들의 출격을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이후 영국은 항공기를 동원하여 노르웨이 해안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고, 이윽고 이들이 노르웨이에 성공적으로 정박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영국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전략자산인 전함이 왜 노르웨이까지 올라왔는지 알 수 없는 턱이었습니다.


특히, 당시 영국의 본토에 정박하고 있던 홈플릿(Home Fleet)은 비록 많은 수의 전함과 순양함, 항공모함을 보유하고 있어 숫적으로 우세하였지만, 비스마르크의 체급은 너무나도 거대했습니다. 또한 비스마르크의 제대로 된 스펙이 지금의 우리에겐 잘 알려져 있지만, 영국 해군은 비스마르크의 세부적인 전투력에 대해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지요. 당시의 비스마르크는 빠른 속도와 강력한 장갑, 그리고 정확한 포술 능력을 바탕으로 많은 국가들에게 최대 위협이었다는 점을 감안해 볼 때, 영국 해군은 굉장히 많은, 그리고 당연한 긴장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Remembering-HMS-Hood-Events.jpg 영국 해군의 자랑이자 영국 해군 최대의 전함인 '무적의 후드', HMS 후드의 모습. 비록 20년이 넘은 구식전함이었지만, 당시로서 그렇게 뒤쳐지는 능력은 아니었습니다.

이제 영국 해군은 전함 'HMS 킹 조지 5세', 항공모함 HMS 빅토리어스와 더불어, 영국 해군 최대의 전함이자 자랑이었던 'HMS 후드(HMS Hood)'를 출격시키기로 합니다. 후드는 비록 건조된 지 20년이 넘어가는 구식함이었지만, 그 최대의 크기와 더불어 무적의 후드(The Mighty Hood)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영국 해군의 자랑이었습니다. 이제, 영국 해군은 비스마르크의 출격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941년 5월 21일 저녁, 비스마르크의 거대한 함체를 서서히 미끄러지며 노르웨이의 해안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곁에는 전후까지 살아남은 최대의 행운함, 프린츠 오이겐이 따라붙었습니다. 이제 이 2척은, 외로운 싸움을 위해 대서양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영국의 본토 함대 전체에 대항해, 2척만으로 성공적인 통상파괴전을 수행해야만 하는 막중함 임무가 부여되었습니다. 이를 영국 공군의 항공기들이 즉각 포착하였고, 이들이 항해를 시작하자마자 항공폭탄을 쏘아붙이며 거세게 이들을 막아섰습니다. 그러나, 악천후와 야간이라는 조건이 겹치면서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은 성공적으로 빠져나가는 데 성공하고, 영국 공군으로부터의 감시에서도 벗어나는 데 성공합니다.

DSC_0015-2-1-scaled.jpg 안개와 악천후를 틈타 항해를 시작하는 비스마르크(좌측)와 그를 따라가는 프린츠 오이겐(우측)의 모습을 그린 상상화.

이제, 영국 해군은 눈에 불을 켜고 이 2척을 찾기 위한 수색 작전에 돌입했습니다.

세계 최대의 전함 비스마르크, 그리고 그 야수를 잡기 위한 영국 해군이 격돌할 시간이었습니다.




(2부에 계속)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