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마르크, 마지막 결전을 감행하다
완벽할 것만 같았던 비스마르크에게도, 운명의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프린스 오브 웨일스에게 입은 피해는 계속해서 커지고 있었고, 우현에 맞은 어뢰공격의 피해도 수리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상처에도 불구하고, 비스마르크의 유일한 희망은 영국 해군이 추격 도중 자신들을 놓쳤다는 것이었습니다. 비스마르크는 이 마지막 기회를 살려 프랑스로의 항진을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외톨이 비스마르크였지만, 상황 자체는 크게 나쁘지만은 않았습니다. 지난 전투 이후 영국 해군은 거의 다 잡은 비스마르크를 놓친 뒤 수색에 열을 올리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이대로만 항진한다면 비스마르크의 프랑스 도착은 거의 확실시되었으나, 문제는 비스마르크 스스로는 이것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영국 해군의 추격을 받고 있다고 판단한 비스마르크는 현재의 상황을 지속적으로 독일 해군 사령부에 무선으로 보고하였고, 이는 영국 해군으로 감청할 수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전문은 암호화되어 내용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정체불명의 통신이 계속 발신되는 어렴풋한 방향으로 추론할 수는 있었습니다. 독일 해군 사령부는 이 사실을 비스마르크에게 지속적으로 알리려고 하지만, 결국 이루어지지 못하고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위치에 대한 힌트를 계속 흘리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젠 정말 시간싸움이었습니다. 영국 해군이 먼저 찾느냐, 아니면 비스마르크가 독일 공군의 엄호를 받을 수 있는 작전 반경에 먼저 들어가느냐 하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이 고요는 결국 깨지고야 맙니다.
5월 26일 오전, 항공정찰에 의해 비스마르크의 위치가 드디어 밝혀지게 되고,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합니다. 영국의 전함들과 순양함들이 몰려들기 시작하고, 항공모함에서 발진해 지난번 어뢰를 먹였던 소드피시 뇌격기도 비스마르크의 상공에 나타났습니다. 독일 공군의 작전반경에 아슬아슬 걸쳐있었지만, 기상악화를 이유로 항공기가 출격하지 않았던 것에 비스마르크는 아쉬움을 삼켜야만 했습니다.
영국 해군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예비용 연료탱크를 장착한 항공기들이, 연료상황에 따라 교대로 임무를 수행하면서 비스마르크를 향한 감시를 지속했습니다. 이러한 감시 아래, 비스마르크는 조용히 항해를 지속했습니다. 그야말로 폭풍전야였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던 오후 20시경 소드피시 편대가 비스마르크로 고도를 낮추면서 접근했고, 다시 한번 뇌격을 시도했습니다. 이 어뢰 중 1발이 비스마르크의 좌현의 정중앙에 명중하였고, 다른 한 발은 비스마크르의 꼬리 쪽을 강타했습니다. 특히 이 꼬리 쪽의 타격은 비스마르크에게 매우 아쉬운 한 방이었는데, 어뢰를 피하려고 과격한 회피기동을 하던 중, 배의 방향을 결정하는 '키'가 왼쪽으로 꺾인 채로 움직이지 않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거대한 이 강철의 전함은, 이제 약 10여 노트의 느린 속도로 같은 자리에서 빙빙 돌 수밖에 없게 돼버린 것입니다.
뤼첸스 제독은 독일 해군 사령부에 아래와 같은 전문을 보고합니다.
"더 이상 배를 조작할 수 없음."
이제 영국 해군의 구축함들이 비스마르크를 향해 다가갔습니다. 이 구축함들은 작은 체급에도 불구하고, 비스마르크와 포화를 주고받으면서 전투를 이어나갔습니다. 빠른 속도를 이용해서 치고 빠지는 전술을 이용, 비스마르크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데 성공합니다. 원래 이들의 임무는 비스마르크와의 접촉을 유지하는 것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뇌격까지 시도하는 과감성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일본의 야마토 전함이 나오기 전까지 가장 거대한 전함의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던 만큼, 구축함 같은 소형함의 공격에는 끄떡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승조원들의 '피로도'였습니다. 새벽 밤새도록 계속된 구축함들의 공격은 비스마르크의 승조원들에게 극한의 피로도를 선사했고, 그들의 사기는 점차 꺾여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담담하게 그들의 최후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순양함급 이상의 함선들은 정찰과 정확한 포격 유도를 위해 함선마다 정찰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승조원들은 그 항공기에 자신들의 유서와 편지, 그리고 비스마르크의 항해일지를 포함한 중요한 자료들을 실었습니다. 이 항공기 1대 만이라도 띄워서 고국으로 보내려는 시도였습니다. 그러나, 기상악화와 더불어 캐터필러의 고장으로 인해 성사되지 못했지만요.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비스마르크의 마지막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1941년 5월 27일 오전 9시, 영국 전함 'HMS 로드니(HMS Rodney)'가 정적을 깨고 첫 포탄을 발사했습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보기 힘들었던 주력 전함들 간의 포격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비록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비스마르크 주포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비스마르크의 포탄은 아슬아슬 위험천만하게 로드니의 함교 근처에 떨어졌고, 양측은 더욱 맹렬하게 서로에게 포탄을 쏟아부었습니다.
영국 전함 'HMS 킹 조지 5세(HMS King George V)'도 이 전투에 참여했습니다. 프린스 오브 웨일스의 자매함인 킹 조지 5세도 주포탄을 쏘아붙이며 비스마르크를 향해 항진했습니다. 추격전 초반부터 맹활약했던 순양함 노포크, 그리고 수색작전에 참가했던 순양함 'HMS 도셋셔(HMS Dorsetshire)'도 이에 합류했습니다. 비스마르크는 이제 온몸으로 그들의 포탄을 받아내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로드니에서 쏘아 올린 주포탄이 비스마르크의 갑판과 함교에 각각 명중했습니다. 주요 고위 지휘관이 죽거나 다치면서, 비스마르크의 지휘체계는 빠르게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뤼첸스 제독도 이 사격으로 인해 그만 현장에서 전사하고, 린데만 함장도 중상을 입고 말았습니다. 이후에도 계속되는 영국 전함들의 사격으로 인해 비스마르크가 보유한 4개의 포탑은 차례차례 제압되기 시작했습니다.
비스마르크가 이렇게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는 동안, 지휘권이 무너진 비스마르크 함 내에서도 최후를 위한 준비를 시작합니다. 남아있는 장교들이 배를 버리기로 결심하고, 이윽고 배를 자침 시키기 위한 준비에 돌입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상적인 명령계통으로 지휘권을 인수받아 이를 행사한 것이 아닌, 현장에서 몇몇 장교들의 독단으로 결행된 일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이 아쉬운 결정으로 인해 승조원들은 유기적인 대응을 포기하고, 각자도생으로 각각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이 시점을 기점으로 더 이상 비스마르크는 유기적인 군함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고, 생존의 무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영국 해군의 입장에서 이 가라앉지 않는 전함의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했습니다. 영국 해군은 결국 순양함 도셋셔에게 뇌격을 지시하고, 도셋셔에서 발사된 어뢰가 비스마르크의 함체를 강타했습니다. 서서히, 비스마르크의 함체가 선미부터 가라앉기 시작하며 선수를 들어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 전투를 시작한 지 약 1시간 30분이 지난 시각이었습니다.
그렇게, 비스마르크는 대서양의 심해를 향한 마지막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에필로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