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 그 경계사이의 애매모호한 그 어딘가에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에 대한 군사작전을 개시, 전쟁이 발발한 지도 어느새 1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세계 2위의 군사강국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도 러시아군은 개전 초기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데 실패하였고, 1년이 지난 지금은 오히려 공세를 펼치기에도 부족한 전력으로 우크라이나군과 공방을 주고받으면서 전황은 비교적 교착상태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언론에서도 계속 다루는 것처럼, 전쟁 초기의 마리우폴 전투와 같은 치열한 공방전이 바흐무트 인근에서도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전투의 치열함만으로는 전쟁 자체를 끝내기엔 아무래도 역부족인 모양이다.
우크라이나군은 전쟁 초기의 혼란을 비교적 잘 수습하고 서방의 지원을 통해 전력을 재정비하는 데 성공하였고, 러시아군의 피해를 강요했다. 그 덕분인지 러시아군은 기대와는 다르게 신속한 키이우 점령에 실패하고 단기전의 신화에서 불편하게 깨어 나와야 했다. 이로 인해 세계의 언론들과 세간의 이목은 우크라이나군의 선전과 그에 따르는 서방의 지원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러시아군의 전쟁개시와 그 수행방법에 대해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러시아는 어떠한 기대효과를 노리고 우크라이나를 공격했을까? 그리고 요즘말로 어떠한 "그림"을 설계하고서 들어갔을까, 하는 질문이 나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번 글에서 나는 러시아의 전쟁개시의 전략, <하이브리드 전쟁>에 집중해 볼 것이다. (러시아의 전쟁개시 이후의 우크라이나군과 러시아군의 "전투" 그 자체에 대한 것은 나중에 또 다른 글에서 다뤄보고자 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발발, 그리고 러시아의 의도라는 부분을 말하기 전에 우선 먼저 러시아의 입장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먼저 말해둔다. 여기서의 "이해"란, 러시아의 행동을 넓은 아량으로 이해하고 포용한다기보다 "understand"의 이해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 서방의 행동에 있어서 굉장히 신경질적으로 반응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조금 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 본 게시글은 러시아, 혹은 어느 일방의 편을 들기 위함이 아닌, 우크라이나 전쟁의 원인, 특히 러시아의 이유에 대해 서술하고자 하니 독자분들의 양해를 미리 구한다. ****
냉전이 끝나가던 무렵 순식간에 벌어진 독일 통일 사건은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모두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러한 독일의 통일에 대해서 유럽 각국은 각자의 입장을 내놓았는데, 소련의 경우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공산진영에서 큰 우방이었던 동독이, 서독에게 흡수당하는 방식의 통일은 소련 입장에서 절대 승낙하기 어려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련의 고민에 대해 당시 미국 국무장관 베이커는 "NATO는 절대 1인치도 동쪽으로 뻗어나가지 않을 것"이라는 발언으로 소련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2008년 부쿠레슈티 협약에서는 조지아(그루지야)와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에 대한 논의가 촉발되었다. 러시아는 이를 "독일 통일 논의 당시에 약속과는 다르다"며 강하게 반발했고, 미국은 이에 대해 "당시 그것은 협약이나 협정이 아닌, 그저 개인의 말 한마디였을 뿐"이라는 말로 일축했다. 러시아가 보았을 때, 미국과 서방세계는 이미 자신을 묶어놓기 위한 '러시아 포위망'의 일환으로 보았다.
특히, 유고 내전 당시 NATO군이 개입한 사건은 러시아로 하여금 '서방세계의 침략의 신호탄'이라고 판단한 큰 계기 중 하나였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사소한 과오를 빌미로 거대한 군사력을 동원, 어느 한 국가를 깔아뭉개는 게 맞는가?' 하는 반발심과 더불어, 이는 미국과 서방세계의 강제적 정권교체 작전이라는 의심마저도 들게 하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러시아는 그루지야를 기습침공하며 승리를 거두었고, 이를 통해 NATO의 동진에 대한 자신들의 의견을 무력으로 내보였다. 러시아의 빠른 전쟁수행에, NATO군이 할 수 있었던 것은 흑해 인근에서의 무력시위뿐이었다. 이는 러시아에게 한 가지 환상을 가지게 만들었는데 그것은 아래와 같다.
서방세계는 "러시아! 너네 군사력을 사용하여 전쟁을 일으키면 우리가 개입할 거야!"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지금 현 상황이 전쟁이 일어난 건지 아닌지, 군사력을 사용한 건지 아닌 건지 헷갈리게 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러시아의 방법론적 고민이었다. 전쟁과 평화의 사이를 애매모호하게 만들어, 전쟁도 아닌 것이, 평화도 아닌 것이.. 하고 서방세계의 군사력 투입을 주저시키는 방법을 생각해낸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 입각하여, 러시아는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을 준비하여 왔다. 그 준비의 서막은 2014년 유로마이단 시위로부터 올라가게 되는데, 이를 통해 러시아는 대대적인 침략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서방세계가 판단하기 어려운,
전쟁과 평화, 그 경계 사이의 모호한 그 어딘가에서부터.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