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여름이 끝나간다. 바다는 여전히 푸른데, 파도의 끝자락에서 미묘하게 색이 바뀐다. 햇빛은 한 톤 내려앉고, 그늘은 길어졌다. 협재의 모래는 낮보다 저녁에 더 따뜻해 보이고, 물 위로 떨어진 빛 조각들이 천천히 숨을 고른다. 나는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바람이 남기고 간 소금기를 느껴본다. 한 계절을 지나온 얼굴이 이렇게 부드러워질 수 있다는 걸, 제주에서 처음 알았다.
사려니숲길을 걸을 때는 여름의 끝이 목소리로 들렸다. 잎사귀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이 말끝을 흐리고, 나무들이 서로에게 건네는 작별 인사가 낮게 깔렸다. 초록은 여전히 충분했지만, 이미 다음 색을 준비하는 마음이었다. 우리가 그렇게 컸던 것처럼—떠나보낼 걸 떠나보내며, 다음을 위해 조금씩 자리를 내어주는 방식으로.
해안도로의 카페에서 마신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끝까지 차가웠지만, 손끝은 이상하게 따뜻했다. 여름이 남긴 체온이 내 안에서 느리게 식어가고 있었기 때문일까.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 창밖으로, 현무암 울타리 사이 사이로 빛이 스며들었다. 끝은 늘 이렇게 조용히 다가온다.
떠들썩한 인사보다, 작고 분명한 기척으로.
하지만 가을은 기다려 달라 말하지 않는다. 그냥 온다. 제주의 바람은 핵심만 남기는 방식으로 계절을 넘긴다. 콧등을 스치는 서늘함, 파도 소리에 섞인 빈틈, 석양이 오름의 어깨에 얹어놓는 금빛. 그 순간들 속에서 나는 알았다. 가을은 상실이 아니라 여백이라는 걸. 비워야 보이는 모양들이 있고, 식어야 드러나는 맛이 있다. 사랑도 그렇다는 걸.
우리는 여름 내내 같은 방향으로 걸었지. 모래에 남긴 발자국이 물에 지워질 때마다, 우리의 속도는 조금 더 닮아갔다. 약속은 요란하지 않았다. 장마처럼 쏟아붓기보다, 이슬처럼 스며드는 말들이 더 오래 갔다. 그리고 이제, 가을의 문턱에서 나는 다짐한다. 바쁜 도시로 돌아가도, 컵에 떨어지는 물소리 하나, 창틀에 앉은 빛 한 줌, 오후 공기의 미세한 서늘함을 놓치지 않겠다고. 그게 우리가 들고 가는 진짜 기념품이니까.
제주에서 배운 것은 계절의 예의였다. 무언가 끝날 때는 다음을 위한 자리를 정리하고, 시작할 때는 먼저 듣는 자세를 갖추는 일. 그래서 여름이 끝나도 슬프지 않다. 슬픔보다 선명함이 먼저 온다. 우리는 마지막 해변에서 손을 흔들고, 아직 말하지 않은 인사를 마음에 적는다. “곧 다시 만나자.” 바람이 그 문장을 받아 적는다. 가을의 필체로.
그리고 아는 거야. 제주가 멀어져도, 우리가 배운 리듬은 남는다는 걸. 천천히 숨 쉬고, 다정하게 걸으며, 필요한 때에 멈출 줄 아는 리듬. 여름은 끝났지만, 사랑은 오히려 더 또렷해졌다. 다음 색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계절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