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호박빛 온기

​소란스러운 세상 속, 나를 지탱하는 고요한 위로

by 나리솔


기억의 호박빛 온기



기억은 고요한 바다와 같습니다. 나의 가장 깊고 애틋한 사랑은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름도 없고 말도 할 줄 모릅니다.


그 사랑은 짙은 호박색을 띠고 있으며, 여름의 끝자락, 낡고 오래된 나무집에서 우려낸 따뜻하고 쌉싸름한 차의 맛을 품고 있습니다.


​생각이 그곳으로 향할 때면, 나는 다시금 오래되고 메마른 나무 벽에서 배어 나오는 짙은 소나무 진액의 향기에 천천히 젖어듭니다.


손때 묻은 낡은 찻잔의 가장자리에 입술을 댈 때면 — 기억이 건네는 그 길고 느릿한 입맞춤을 통해 — 나는 마치 세월을 가로질러 나의 작은 돛단배를 띄우는 것만 같습니다.


창밖으로 하루의 끝을 알리는 희미한 빛이 스러져가는, 그 아늑한 과거를 향해서 말입니다.


​창밖으로는 이따금 가을의 쓸쓸한 비가 지붕을 두드리며 차가운 소리를 낼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작은 공간 안에는 타닥타닥 타오르는 난로의 다정한 속삭임이 있었고, 공기 중에는 잘 말린 허브와 들꽃의 향기가 포근하게 내려앉아 있었습니다. 은은한 노란빛 전등 아래, 수많은 손길이 스쳐 가 매끄러워진 나무 탁자는 그 자체로 하나의 위로였습니다.


​나는 두 손으로 온기를 감싸 쥔 채, 그 구원과도 같은 다정한 파도에 기대어 차를 마셨습니다. 입술에 닿는 뜨거운 김과 방 안을 채우는 훈훈한 공기는, 마치 신선한 숨을 내쉬는 고요한 안식처처럼 나를 감싸 안았습니다.


​어둡고 촉촉한 밤, 오래된 집이 낮게 숨을 쉴 때면 차를 내리는 시간은 조용한 의식이 되었습니다. 찻잔 속에는 야생 장미와 찻잎이 우러난 호박빛 힘이 가득 차올랐고, 그것은 내 안에서 서서히 번지며 세상을 견뎌낼 따스한 에너지가 되어주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이 소란스러운 세상의 물결 속에서 흔들릴 때면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아봅니다. 내 손 안에는 결코 빈 공간이 없습니다. 그 옛날 찻잔이 주었던 묵직한 온기는 마치 내 두 손에 완전히 맡겨진 또 다른 존재처럼 여전히 선명합니다.


코끝을 맴도는 소박한 차의 향기, 피어오르는 하얀 김, 그리고 따스한 나무의 숨결은 마치 은빛 물고기처럼 시간을 미끄러져 와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에 고요히 자리 잡았습니다. 그것은 아주 느리고도 굳건하게 내 안의 하늘을 지탱하는 에너지가 되어 숨 쉬고 있습니다.


​이제는 만질 수 없지만, 영원히 나의 단단한 안식처가 되어주는 무언가에 대한 조용한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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