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는 천천히 바닷가 마을로 다가가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햇빛에 반짝이는 논밭과, 안개 속에 잠긴 산들이 스쳐갔다.
강도연은 창가에 앉아, 봉인된 도장의 각인이 선명한 봉투를 손에 쥐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유언장.
종이는 차갑고 얇았지만, 그의 가슴속에는 훨씬 더 무거운 덩어리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가 이곳을 떠난 지 12년.
서울로 유학을 떠나던 그날, 그는 누군가에게 꼭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었다.
열차가 멈추자 도연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
짭조름하고도 청량한 바닷바람이 그의 폐를 가득 채웠다.
모든 것이 어릴 적 모습 그대로였다.
항구의 작은 배들, 하얀 갈매기들, 좁은 골목길과 오래된 가게들.
모퉁이에는 여전히 아이스크림 가게가 자리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집은 삐걱대는 마룻바닥과 말린 약초 향으로 그를 맞이했다.
낡은 장롱 속에서 그는 사진첩 하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끼워져 있던 말라버린 꽃 한 송이가 흘러내렸다.
그 순간, 기억이 되살아났다.
맑게 웃던 소녀가 들판의 꽃을 건네던 장면.
“꼭 돌아올 거지?”
그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다음 날, 도연은 바닷가 산책로를 걸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리니, 넓은 창이 있는 화실이 보였다.
그 안에는 아이들과 함께 그림을 가르치는 여인이 있었다.
긴 머리카락을 묶고, 부드러운 눈빛으로 아이의 손을 잡아주는 모습.
도연의 발걸음이 멈췄다.
심장이 요동쳤다.
그녀였다. 윤하연.
그 여름을 함께한 바로 그 소녀.
그는 가까이 다가섰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 …도연이야?
놀란 듯한 목소리.
그는 겨우 입술을 열었다.
— 하연아…
그녀는 웃지 않았다.
대신 시선을 피하며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 …돌아왔구나.
짧은 대화 뒤에 두 사람 사이에 길고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파도 소리와 갈매기의 울음소리만이 그 공간을 채웠다.
그날 저녁, 바다는 붉게 물들었다.
도연은 그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많은 것이 변했어.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 하연이야.”
그리고 그 순간, 하연도 알았다.
긴 세월의 침묵 속에서도 마음 한편이 여전히 그에게 열려 있었다는 것을.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붉게 물든 바다 위로 갈매기 떼가 날아올랐다.
마치 두 사람의 잊힌 약속을 다시 이어주려는 듯.
그 여름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다.
단지, 다시 시작될 날을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