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문을 열고: 나의 새벽을

23장: 잔잔한 위로의 계절

by 나리솔


23장: 잔잔한 위로의 계절




지난 폭풍우가 할퀴고 간 자리는 깊은 상흔을 남겼지만, 신기하게도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렀다. 그 날카로운 배신의 아픔과 실망감은 마치 날카로운 유리 조각처럼 내 마음에 박혀 있었지만, 매일 뜨고 지는 해처럼,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처럼, 계절의 변화는 어김없이 찾아왔다. 회색빛으로만 물들었던 내 세상에도 조금씩 다른 색깔이 번지기 시작했다. 잿빛 구름이 하늘을 뒤덮었던 날이 거짓말처럼 멀어져 가고, 어느새 햇살이 창문을 넘어와 방 한가득 따스한 온기를 드리우는 날들이 많아졌다. 내 마음에 드리웠던 짙은 안개도 한 줄기 빛을 찾아 천천히 걷히고 있었다.

나는 억지로 무언가를 하려 애쓰지 않았다. 그저 나에게 주어지는 모든 순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혼자 걷는 법을 배우던 시간은, 이제 고독이 아닌 '고요함'으로 바뀌어 나를 감싸 안았다. 처음에는 세상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숨고 싶다는 마음이었지만, 점차 혼자만의 시간이 주는 안정감과 평화로움을 발견하게 되었다. 매일 아침, 따뜻한 물 한 잔으로 시작하는 하루. 향기 좋은 차를 천천히 음미하며 창밖을 바라보는 시간은 이전에는 상상도 못 할 여유를 선물했다.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김처럼, 내 안의 불안과 상념들도 희미하게 사라지는 듯했다.

작은 것들에서 기쁨을 찾는 법을 다시 배웠다. 잊고 지냈던 취미들을 하나둘씩 꺼내들었다. 좋아하는 책을 아무 목적 없이 그저 읽고 또 읽었다. 활자 속에서 길을 잃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문장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기도 했다. 예전에 즐겨 듣던 음악들을 다시 들으며, 멜로디 속에 담긴 감정들이 내 안의 얼어붙은 감각들을 부드럽게 깨웠다. 나만의 작은 아틀리에를 꾸며, 물감으로 캔버스 위를 자유롭게 채워 나가는 기쁨도 되찾았다. 예쁘지 않아도 괜찮았다. 잘 그리지 못해도 괜찮았다. 그저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손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위로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자연이 나에게 준 위로는 그 어떤 인간의 말보다도 깊었다. 발걸음이 닿는 대로 나아가 도착한 작은 공원, 그곳에서 나는 나무들의 흔들림을 한참이나 바라보곤 했다. 바람에 몸을 맡기는 나뭇잎들은 마치 나에게 '그저 흘러가는 대로 두어도 괜찮다'고 속삭이는 듯했다. 맑고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어릴 적 하늘을 보고 상상에 잠기던 그때의 나로 돌아가는 듯한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해 질 녘 노을이 온 세상을 붉게 물들이는 장엄한 풍경 속에서, 나의 작은 슬픔들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 깨달았다. 폭우가 쏟아지던 날에는 창가에 앉아 빗소리에 귀 기울이며, '하늘도 이렇게 마음껏 우는구나' 생각하며 위안을 받았다. 자연은 아무런 조건 없이 나를 품어주었고, 그 품속에서 나는 안전하고 평온했다.

그 안에서 나는 스스로의 가치를 다시금 찾아냈다. 누군가의 인정이나 소속감에 기대어 살지 않아도, 나는 온전하고 빛나는 존재라는 것을. 예전의 나는 상처 입은 새처럼 날개조차 펼 수 없었지만, 이제는 나만의 힘으로 천천히 날갯짓하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어깨를 짓눌렀던 거대한 짐을 내려놓자, 비로소 나 자신이 자유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씁쓸한 과거의 기억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더 이상 나를 묶어두지 못했다. 오히려 그 아픔들이 나를 더 깊고 따뜻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음을 깨달았다. 이전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마음도 더 커졌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들른 작은 서점에서 같은 책을 고르던 이와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마주친 눈빛 속에서 나는 알 수 없는 따뜻함과 연결감을 느꼈다. 비록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었지만, 진심 어린 미소와 교감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편안함이었다. 억지로 관계를 만들려 애쓰지 않아도, 나의 진정한 모습을 받아들여 줄 사람들이 언젠가 자연스럽게 찾아올 것이라는 희미한 희망이 가슴속에서 피어올랐다.

내 안에는 이제 어떤 맹렬한 희망이나 거창한 꿈보다는, 잔잔하고 굳건한 평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세상이 나를 배신하고 흔들어도, 나 스스로는 결코 나를 놓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행복은 누군가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스스로 찾아내고 만들어가는 것임을 깨달았다. 더 이상 화려한 무엇인가를 좇지 않아도 좋았다. 그저 이대로, 이 잔잔한 평화 속에서, 나 자신을 사랑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했다.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와도,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수많은 별들이 나를 포근하게 감싸 안는 것처럼 느껴졌다. "별이 지는 저 하늘에..."라는 노래 가사가 저절로 흥얼거려졌다. 모든 아픔은 아픔대로 내 삶의 일부가 되어, 나를 더욱 단단하고 아름답게 빚어냈음을 알기에. 고요한 밤, 창가에 기대어 앉아 하늘을 바라보며 나는 작게 미소 지었다. 이제 정말 괜찮다고. 모든 것이 잘 될 거라고. 내 안의 평화가, 마침내 온전히 나의 것이 되었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