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속의 마지막 약속

작지만 끝까지 남는 이유

by 나리솔


바람 속의 마지막 약속



서대문구 서쪽의 작은 동네, 오래된 서울 골목들 사이로 길들이 마치 뒤엉킨 실타래처럼 얽혀 있었어. 길들은 짧은 골목길들로 끊어져 기이한 각도와 곡선들을 만들어냈지. 어떤 골목길은 심지어 자기 자신을 두 번이나 가로지르기도 했어.

바로 이곳, 낡은 지붕과 다락방들 사이에 한때 젊은 예술가들이 청계천에서 건너와 자신들의 동아리와 화덕을 옮겨 작은 ‘예술인 마을’을 만들었어.


수아와 존희의 작업실은 옛 양식의 3층짜리 벽돌집 맨 위층에 있었어. 존희는 제주도에서, 수아는 부산에서 왔어. 둘은 홍대 작은 식당에서 값싼 점심을 먹다가 만났고, 예술과 치커리 소스 샐러드, 그리고 새로운 시즌의 넓은 소매 옷에 대해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지. 그렇게 둘의 공동 작업실이 탄생했어.


그때는 봄이었어. 가을이 되자 동네에는 폐렴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님이 소리 없이 돌아다녔어. 이 살인마는 도시 동부를 거침없이 휩쓸며 수십 명을 쓰러뜨렸지만, 이곳 좁고 오래된 골목들에서는 느릿느릿 움직였어. 부드러운 제주 바람에서 온 자그마한 소녀는 이 늙고 지친 적수에게 적수가 되지 못했지. 폐렴은 그녀를 쓰러뜨렸고, 존희는 쇠 침대에 움직이지 않고 누워 오래된 창문의 나무틀을 통해 옆집 벽에 붙어 자라는 담쟁이덩굴을 바라보았어.


어느 날 아침, 근심 어린 눈썹의 의사가 수아를 복도로 불렀어.

“10분의 1 확률입니다.” 그가 말했어. “그것도 본인이 살고 싶어 해야만 가능합니다. 사람이 죽음을 생각하면 약은 소용이 없어요.”


수아는 방으로 돌아와 잡지 일러스트용 태블릿을 들고 앉아 낮은 목소리로 K-POP을 흥얼거렸어. 존희는 창문 쪽으로 등을 돌리고 누워 있었어. 수아는 잠든 줄 알았지만, 나지막한 속삭임을 들었어.

“열두… 열한… 열… 아홉…”


수아는 다가가 창밖을 보았어. 무엇을 세고 있는 걸까? 그저 벽돌 벽에 매달린 늙은 담쟁이덩굴뿐이었어. 잎들이 떨어지고 있었지.

“무엇을 세고 있니, 존희?”

“잎사귀.” 그녀가 간신히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어. “마지막 잎사귀가 떨어지면, 나도 죽을 거야.”


수아는 농담으로 넘기려 했지만,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자라났어. 그녀는 아래층에 사는 늙은 화가 배 씨에게 내려갔어. 배 씨는 불평이 많고, 수염은 늙은 현자처럼 구불거렸지만, 항상 자신의 미래 걸작에 대해 이야기했어. 그는 수아의 이야기를 듣고는 버럭 화를 내며 욕을 하더니, 날카롭게 말했어.

“나를 위로 데려가게. 내가 모델을 설 테니.”


그날 밤 서울에는 눈 섞인 차가운 비가 내렸고, 바람이 잎사귀들을 찢어발겼어. 모두들 아침에는 벽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아침이 되어 수아가 존희의 부탁으로 커튼을 걷었을 때, 한 잎이 여전히 매달려 있었어. 잎자루는 짙은 녹색이었고 가장자리는 노랗게 변했지만, 젖은 벽돌 벽을 배경으로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어.


“저게 마지막이야.” 존희가 속삭였어. “저게 떨어지면 나는 떠날 거야.”


하지만 하루가 지났어. 밤은 바람과 비와 함께 찾아왔어. 아침이 밝았지만, 잎은 여전히 제자리에 있었어.


존희는 오랫동안 그것을 바라보다가 말했어.

“내가 바보 같았어. 저 마지막 잎사귀는 아마도 나에게 죽음을 바라는 것이 죄임을 보여주려고 남아있었나 봐. 나는 살고 싶어. 내게 죽 좀 가져다줘. 그리고 우유도.”


며칠 후 의사는 수아에게 말했어.

“그녀는 이제 위험에서 벗어났습니다. 당신이 그녀를 살렸어요.”


수아는 존희를 껴안으며 나지막이 말했어.

“내 하얀 쥐야, 너에게 말해줄 게 있어. 배 씨가 돌아가셨어. 그날 밤 그는 추위에 나갔다가 비를 흠뻑 맞았어. 우리는 손전등과 사다리, 그리고 녹색과 노란색 물감이 묻은 붓과 팔레트를 찾았어. 잎사귀가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았다는 게 이상하지 않았니? 그게 그의 걸작이야. 그는 진짜 마지막 잎사귀가 떨어졌을 때 그걸 그렸어.”


창밖의 낡은 담쟁이덩굴은 예전과 같아 보였지만, 그 위에는 한 잎이 빛나고 있었어. 평생 걸작을 꿈꾸며 살았던 한 사람의 손으로 그려져 다른 이들에게 희망을 선물한, 바로 그 걸작 말이야.





가장 어두운 밤에도 끝까지 남는 빛이 있다.
가장 거센 바람에도 떨어지지 않는 잎이 있다.


그것은 누군가의 손길이 남겨 준 희망이자,
또 다른 누군가의 삶을 이어 주는 숨결이다.


우리는 때때로 스스로를 약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누군가에게 마지막 잎이 되어 주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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