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를 품지 않는 지혜.
서운해해야 할 때는 단 하나뿐이다. 누군가 일부러 나를 상처 주려 할 때다.
만약 상대가 전혀 그런 의도가 없었는데, 단순한 실수나 우연이 내게 상처처럼 느껴졌다면, 굳이 마음에 담아 둘 필요가 있을까?
그럴 때는 화내지 말고 오해를 풀면 그만이다.
그러나 상대가 정말 나를 모욕하려 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럴 때조차 똑같이 상처로 응수할 필요가 있는지 먼저 생각해야 한다. 서운함이란 대개 땅바닥에 떨어진 돌멩이와 같다. 그것을 집으려면 몸을 굽혀야 한다. 굳이 고개를 숙이고 손을 더럽힐 가치가 있을까?
만약 꼭 서운해하고 싶다면, 먼저 마음속에서 작은 ‘수학적 계산’을 해 보는 게 좋다.
누군가가 내 잘못의 일부만을 근거로 비난했다면, 그 ‘일부’만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빼 버려라. (빼기.)
혹은 상대의 말이 거칠었지만 그 속에 나를 위하려는 선한 뜻이 숨어 있다면, 그 마음을 따로 떼어 나누어 보라. (나누기.)
이렇게 마음속에서 덧셈과 뺄셈, 곱셈과 나눗셈을 하다 보면, 남은 감정은 훨씬 가벼워지고, 대응은 더욱 품위 있어진다. 진정한 품격이란, 서운함 자체에 무게를 두지 않는 데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서운해하는 성향은 사실 지혜의 부족, 혹은 내면의 불안감에서 비롯된다. 그러니 현명한 사람은 사소한 일에 쉽게 마음을 다치지 않는다.
영국에는 이런 격언이 있다.
“의도적으로 상처 주려 할 때만 서운해하라.”
그 외의 경우, 단순한 건망증이나 무심함에는 서운해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런 이에게는 더 따뜻하게 배려하는 것이 훨씬 아름답고 고귀하다.
그렇다면 반대로 내가 누군가를 상처 줄 수 있는 상황이라면?
특히 서운함에 민감한 사람들 앞에서는 말과 행동을 더욱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서운함은 당하는 사람에게도, 주는 사람에게도 오래 남는 아픔이 되기 때문이다.
서운함은 완전히 없앨 수 없는 인간의 감정이다. 하지만 그것을 다루는 방식은 오롯이 우리의 선택이다.
서운함을 ‘쌓는 마음’이 아니라, ‘풀어 주는 지혜’로 바꾼다면 인간관계는 한층 더 단단해진다.
진정한 강함이란 무심히 상처를 주지 않는 것이며, 진정한 지혜란 받은 상처를 꼭 상처로 남겨 두지 않는 것이다.
결국 서운함을 품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자유로운 사람이다.
서운함에 머무는 사람은 과거에 묶이고, 서운함을 흘려보내는 사람은 미래로 걸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