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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종이의 바스락 거림

by 나리솔

오래된 종이의 바스락 거림



그녀의 이름은 소윤이었어. 매일 아침, 소윤이는 할머니가 선물해 주신 오래된 도자기 찻잔에 차를 내렸지. 그리고 찻잔을 손에 들 때마다 그녀는 차의 따뜻함뿐 아니라, 할머니 집과 말린 허브 향기, 그리고 고요함으로 이어지는 아득한 추억의 온기를 느꼈어.


소윤이는 늘 바빴어. 일, 가족, 걱정거리… 이 모든 것이 그림자처럼 그녀를 따라다니는 끝없는 할 일 목록이 되었지. 이런 바쁜 삶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어느 날 문득 멈춰 서서 깨달았어. 그저 존재하는 법을 잊었다는 걸. 그녀의 내면세계는 마치 오래된 다락방처럼, 오래전에 버렸어야 할 것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것들을 간직하고 있었어.


치유는 우연히 시작되었어. 오래된 상자들을 정리하다가, 수년 전 엄마가 쓴 누렇게 바랜 편지들을 발견한 거야. 처음엔 그냥 훑어보려 했지만, 무언가가 그녀를 멈춰 세웠지. 소윤이는 창가 옆 바닥에 앉아 편지를 읽기 시작했어.


그것들은 소박한 것들에 대한 편지였어. 봄비, 첫사랑, 그리고 엄마가 마음속 깊이 간직했던 두려움과 희망에 대한 이야기들. 편지를 읽으면서 소윤이는 엄마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발견했어. 그녀가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두려움과 불안이 얼마나 희미하고 보이지 않는 실처럼 대물림되어 왔는지를 보게 된 거야. 하지만 동시에 그 안에서 힘도 함께 전해져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어느 편지에서 엄마는 불안 때문에 잠 못 이루었던 밤에 대해 썼어. 하지만 결국 일어나 붓을 들고 자신을 괴롭히던 모든 것을 종이에 적었대. 그리고 그 종이를 접어 상자에 넣어두었다고. 엄마는 이렇게 썼어. "그렇게 하고 나니, 내 두려움이 더 이상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상자 안에 놓여 있는 것 같았어. 원할 때 언제든 다시 꺼내 볼 수 있지만, 더 이상 그 두려움이 나를 지배하지 않아."


소윤이도 똑같이 했어. 그녀는 깨끗한 종이를 꺼내 글을 쓰기 시작했어. 처음엔 어려웠지, 단어들이 쉽게 나오지 않았거든. 하지만 이내 오랫동안 억눌려 있던 물줄기처럼 글이 쏟아져 나왔어. 그녀는 자신의 억울함, 차마 말하지 못했던 말들, 끝까지 극복하지 못한 상실감에 대해 썼어. 자신이 되고 싶었지만 감히 그러지 못했던 소윤이에 대해서도 적었지.


글을 마치고 나니 손이 떨렸어. 그녀는 종이를 접어 엄마의 편지들이 놓여 있던 그 상자에 넣었어.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지. 두려움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에 공간을 주어 더 이상 자신의 일부가 아니라 자신의 역사의 한 부분이 되게 한 거야.


그날 저녁 소윤이는 평소처럼 지쳐 있지 않았어. 그녀는 다시 차 한 잔을 내리고 발코니로 나갔어. 밤은 고요했고, 하늘에서는 부드러운 달빛이 쏟아져 내렸어. 소윤이는 달빛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처음으로 그저 자신이 '존재한다'라고 느꼈어. 일하거나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세상을 부드럽게 비추는 달빛처럼 그저 존재하고 있다고. 그리고 이 소박한 고요함 속에서 그녀는 가장 중요한 치유를 발견했어. 모든 오래된 편지와 새로운 페이지들을 가지고 있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허락해 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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