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 하나의 온도

빛이 머문 자리, 고요한 그림자의 위로

by 나리솔


그늘 하나의 온도


가끔은 삶이 작은 그림자들로 이루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밝은 햇살 아래서 저녁이 되면 길게 드리워지는 그런 그림자가 아니라, 우리 내면에 내려앉는 조용하고 거의 눈에 띄지 않는 그림자 말이야. 우린 그 그림자를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살결로 느껴. 마치 아무 예고 없이 찾아오는 시원한 바람의 가벼운 손길처럼 말이야.


얼마 전, 창가에 앉아 있는데 햇살 한 줄기가 테이블 위를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 걸 보았어. 처음엔 책장 한 귀퉁이에만 머물다가, 이내 종이 전체를 환한 빛으로 채웠지. 그런데 내가 잠시 고개를 돌리자, 그 빛은 마치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 버렸어. 그리고 종이 위에 부드러운 그림자만 남은 바로 그 순간, 나는 왠지 모를 이상한 평온함을 느꼈어.


우린 늘 화려한 것에서 의미를 찾잖아. 승리나 강렬한 감정, 요란한 사건들 같은 것들 말이야. 하지만 때로는 아무 특별한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곳에서 진정한 삶이 시작되기도 해. 그저 옆에 조용히 드리워져 우리가 서두름을 멈추기만을 기다리는 바로 그 그림자 속에서 말이야.


마음이 힘들 때면 나는 그 햇살의 그림자를 떠올리려고 노력해. 그 그림자는 관심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존재의 증명을 애써 하려 하지도 않았어. 그저 존재할 뿐이었지. 빛이 없는 순간에도 그만의 온기가 있다는 조용한 속삭임처럼. 단 1분만이라도 멈춰 서면 느낄 수 있는 그 온기 말이야.


어쩌면 우리도 그렇게 만들어진 존재인지 몰라. 환하게 빛났다가 어두워지고,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오고,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빛이 되었다가 그들의 그림자가 되기도 하고. 그 모든 것이 결코 틀린 게 아니야. 어떤 순간에는 우리가 세상에 찬란하게 빛나기를 원하고, 또 어떤 순간에는 부드러움을 원하기도 하니까.


그림자는 빛의 부재가 아니야. 그림자는 빛이 취하는 평온의 형태지.


가만히 귀 기울여 스스로를 돌아보면 알 수 있을 거야. 우리가 두려워하는 모든 그림자 안에는 작은 삶의 온기가 숨 쉬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잠시 멈춰 서서 느끼기를 그저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문득 깨닫게 돼. 그림자조차도 포근한 안식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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