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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시간이 천천히 흐르던 시절

글쓰기 이야기 90 년

by 나리솔


그때는 시간이 천천히 흐르던 시절


90년대는 내 마음속에서 오래된 영화 필름처럼 남아 있다.

조금은 빛바래고, 부드러운 불빛이 감돌며,

지금은 쉽게 들을 수 없는 조용한 소리들이 스며 있는 그런 시절.

가끔은 그때 우리가 더 가난하게 살았던 것이 아니라

그저 더 단순하게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단순함이 지금 와서는 거의 사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 시절엔 늘 연결되어 있을 필요가 없었다.

누구도 즉각적인 답을 요구하지 않았고,

하루는 더 길게 느껴졌다.

끝없이 울리는 알림이 우리의 생각을 끊어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을 기다렸고,

편지를 기다렸고,

전화와 만남을 기다렸다.

그 기다림 자체가 모든 순간을 소중하게 만들었다.


창가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그저 조용히 저녁을 보내는 일도 많았다.

‘빨리해야 한다’ 거나 ‘뒤처지면 안 된다’는 마음도 없었다.

우리는 충분히 지루해했고,

그 지루함은 오히려 우리를 더 잘 알게 해 주는

작고 소중한 시간이었다.


90년대의 많은 것들은 완벽하지 않았다.

자주 끊기던 카세트테이프,

잘 돌아가지 않던 되감기 버튼,

햇빛에 바래 가던 사진들.

그러나 바로 그 불완전함 때문에

모든 것이 더 귀하게 느껴졌다.

쉽게 대체할 수 없는 것들 속에서

우리는 가진 것을 더 깊이 아꼈다.


지금은 모든 것이 더 빠르고,

편리하고,

화려해졌지만

이상하게 마음속은 더 조용해진 것 같다.

그 조용함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이제는 일부러 찾아야만 한다.

너무 소란스러운 하루 속에서

나는 가끔 생각한다.

느리고, 조금 불편하고,

조금은 어설펐던 90년대가

어쩌면 더 따뜻했을지도 모른다고.


그때가 더 좋은 시절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우리가 더 천천히,

더 솔직하게,

더 중요한 것들 가까이에 살았기 때문이다.


가끔 눈을 감으면

그 시절의 잔잔한 시간의 소리가

아직도 들리는 듯하다.

서두르지 않고,

조용히 흘러가며,

우리에게 잠시 멈춰도 된다고 말해 주던 시간들.


그리고 그 순간 깨닫는다.

과거로 돌아갈 필요는 없지만

그때의 기억을 품고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지금의 삶에 작은 단순함이 머물 수 있다고.

그 단순함은 여전히

복잡한 세상 속에서

우리를 지켜 주는 조용한 힘이 되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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