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와 찻잔이 가르쳐 준 삶의 여백
오늘 창밖 세상은 잠시 멈추기로 결심한 것 같아요. 마치 종이처럼 부드러운 구름이 하늘을 덮고 지붕 가까이 내려앉아 지평선을 지워버렸습니다.
비가 내리고 있어요. 맹렬한 여름 소나기처럼 온 감각을 요구하는 그런 비가 아니라, 조용하고 단조로운 가을비—‘가려운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이 빗소리는 마치 아무도 읽지 않는 오래된 책의 페이지를 넘기는 듯한 속삭임입니다.
나는 창가에 앉아 이 끊임없는 속삭임을 듣습니다. 한국어에는 ‘멍’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생각을 멈추고 공허를 바라보는 상태를 뜻해요.
‘풀문’은 불을 보고, ‘물문’은 물을 바라보는 것을 말하죠. 지금 나는 ‘비문’, 그러니까 빗속에 녹아드는 중입니다.
이 시간은 영혼에게 천천히 머물러도 되는 허락과 같습니다.
내 앞 낮은 탁자 위에는 질감이 거칠고, 완벽한 대칭을 추구하지 않은 장인의 손길이 느껴지는 흙빛 다기(茶器)가 놓여 있습니다.
그 불균형함 속에 영혼이 깃들어 있지요. 나는 끓인 물을 따라 붓고, 증기가 장난스러운 춤을 추며 차가운 공기 속으로 녹아듭니다.
찻잎을 보세요. 마르고 말린 채 꼭꼭 뭉쳐져 있는데, 우리의 걱정과 닮았어요.
우리는 내면에 그것들을 좁게 묶어두고, 풀어지면 형태를 잃을까 두려워하죠. 하지만 물이 잎을 적시면 서서히 펴지면서 향과 빛깔, 그리고 본질을 내어놓습니다.
온기가 안으로 스며들 때, 저항을 멈출 때만 가능한 일이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평화를 얻으려면 삶에게 ‘우려내도록’ 허락해야 해요. 상황에 맞서 싸우는 대신 그 따스함과 촉촉함을 부드럽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나는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쥡니다. 그것은 친구의 손처럼 따뜻해요. 바로 마시지 않고 향을 깊이 들이마십니다—흙내음과 오래된 나무가 떠오르는 자연의 향기가 나를 둘러싸지요.
이 향기는 내 작은 내면세계와 밖의 광활한 자연을 잇는 다리입니다.
그럼, 찻잔의 쓸모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나요? 찻잔의 가치는 흙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빈 공간에 있습니다. 찻잔이 가득 차 있으면 신선한 차를 담을 수 없잖아요.
우리 머릿속은 종종 가득 찬 잔처럼 보입니다. 뉴스의 소음, 타인의 조각난 의견, 내일에 대한 계획, 어제의 후회로 넘쳐나죠. 지금 이 순간을 위한 자리는 없습니다. 고요함도 없습니다.
이 창밖의 비는 위대한 청소부입니다. 빗방울마다 나무 잎에 쌓인 먼지와 지붕의 그을음을 씻어냅니다.
은유적으로는 우리의 생각까지도 깨끗이 씻어내지요. 빗소리는 도시의 소음을 덮는 흰 소음과 같아 불필요한 것을 쏟아내기 쉽도록 도와줍니다.
나는 한 모금 마십니다. 뜨거운 액체가 몸속 깊은 곳, 얼어붙었던 심장 어딘가를 데웁니다. 이 순간, 과거도 미래도 없습니다. 오직 차 맛, 낙숫물이 처마에 떨어지는 소리, 찾기의 온기만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행복입니다. 관객을 필요로 하는 눈부신 성공의 행복이 아니라, 조용하고 은밀한 평화의 행복이지요. 부드러운 이불 같고, 야간등의 빛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흔히 삶의 의미를 움직임과 성취, ‘누군가’가 되려는 데서 찾으려 합니다. 하지만 한국의 지혜는 대나무를 보라고 속삭입니다.
대나무는 속이 비어 있어 유연합니다. 눈밭에서도 부러지지 않고 흔들릴 줄 알지요.
빈다는 것은 무가치함이 아닙니다. 온전히, 판단 없이 세상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준비가 된 깨끗함입니다.
빗줄기는 거세지며 창밖 정원을 수채화처럼 물들입니다. 형태들은 흐려지고 중요하지 않아요. 나는 서두를 곳이 없습니다. 필요한 모든 것은 지금 이 순간에 있습니다. 숨결, 온기, 물 맛을 느끼는 마음.
세상은 기다려도 좋습니다. 오늘 나는 어디로 갈지 묻지 않고 그저 떨어지는 비에게서 배우겠습니다. 그리고 빈 찻잔에게서도 배울 것입니다. 온기로 가득 차기 위한 존재의 예술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