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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엽서를 든 소녀'라는

글쓰기 회고록

by 나리솔

통제된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한 완전한 반유토피아 소설은 아닐지라도, 다음과 같은 반유토피아적 요소들이 글 곳곳에 스며들어 빛나고 있거든.
인간 소외와 개인의 무력감: "우리 모두 이곳에서는 낯선 이방인들"이라는 말처럼, 도시와 시스템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과 무력함이 반복적으로 나타나. 우체국 시스템 속에서 톱니바퀴처럼 움직여야 하는 '나'의 모습, 그리고 규칙에 짓눌린 상관의 모습이 그래.
권력과 시스템에 대한 비판: "국가라는 유기체가 제대로 기능하게 하는 여러 시스템"이나 "오만한 상관들"의 모습에서 권력이 어떻게 개인의 삶과 꿈을 억압하는지 보여줘. 특히 "시인들과 몽상가들을 총살했지"라는 부분은 꿈과 자유로운 정신을 말살하려는 폭력적인 시스템의 극단적인 면모를 드러내지.
삶의 진정성 상실과 인위적인 환경: 엄마가 가져온 나일론 코트의 향기, 화려하지만 내 것 같지 않던 핼러윈 의상, 그리고 창문을 닦지 않는 도시의 풍경들은 삶의 진정성이 결여된, 인위적이고 때로는 허망한 현실을 상징하는 것 같아.
과거의 흔적과 압도적인 역사: 벽지를 벗겨낼 때마다 드러나는 시대의 흔적들은 개인의 삶 위에 겹겹이 쌓인 역사의 무게를 보여주는데, 이는 때론 개인을 압도하는 거대한 흐름처럼 느껴져.
타인의 꿈속에 사는 듯한 느낌: "낯선 이의 꿈속에서 살아야 하는 거야"라는 문구는 개인이 진정으로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고, 거대한 타인의 의지나 과거의 유산 속에서 헤매는 듯한 감각을 전달해.
이런 요소들을 통해 이야기는 겉으로는 평범한 일상을 그리는 듯하면서도, 그 아래에는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고민과 사회 구조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숨기고 있어.
하지만 동시에 이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장르적 특성도 풍부하게 담고 있어.
성장 소설(Bildungsroman): 어린 시절의 순수한 꿈부터 세상의 부조리를 깨닫고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는 '나'의 내면적 성장이 주된 흐름을 이뤄.
회고록/자전적 에세이: 너의 개인적인 경험과 기억들을 바탕으로 과거의 시간을 생생하게 되살려내고 있잖아.
철학 소설/심리 소설: 꿈과 현실, 삶의 의미, 아름다움, 죽음, 그리고 인간 내면의 복잡한 감정들에 대한 깊이 있는 사색이 글 전체를 관통해.
문학적 리얼리즘: 당시 사회의 모습과 사람들의 삶을 가감 없이 현실적으로 그려내면서도, 문학적인 표현을 통해 깊은 감동을 주지.
시적 산문: 네가 선택한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가 시처럼 아름답고 비유적이며 감성적이야.
그러니 이 이야기는 단일 장르로 규정하기보다는, 반유토피아적인 시선과 철학적 깊이를 지닌 자전적 성장 서사라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 같아. 마치 '꽃 엽서를 든 소녀'가 겪은 고유하고 복잡한 내면의 여정을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처럼 말이야.



꽃 엽서를 든 소녀'라는


서울에서는 아무도 창문을 닦지 않아. 왜인지는 알 수 없지. 나는 80년대 후반, 세상이 격변하던 시기에 비로소 이 사실을 깨달았어. 그때는 창밖을 내다보는 것보다 텔레비전을 보는 게 더 흥미로웠던 게 분명해. '또 누가 해임됐지? 또 무엇이 허용되었을까?' 그렇게 정치에 대한 관심은 시들해지고, 사람들은 홀린 듯이 드라마에 빠져들었어. 그러니 비눗물이 담긴 양동이를 들고 창문을 닦을 틈이 어디 있었겠어? 그 후 삶은 파산으로 치닫기 시작했고, 돈은 바닥나고, 식탁보 위로 천장이 무너져 내리고, 벽지는 리본처럼 말려 올라갔지. 이런 상황에서 창문을 닦는다는 건 어쩐지 부적절한 행동처럼 느껴졌을 거야. 게다가 서울은 늘 어떤 오만함, 아파트 관리사무소 직원부터 최고 권력자까지 모든 계층의 위정자들에 대한 쓰디쓴 경멸을 품고 있었어. '만약 '그들'이 나를 이렇게 대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면, 자, 친애하는 각하, 여기 나의 더러운 창문이 있습니다, 한번 받아보시죠.' 하지만 다른 설명들도 가능해. 낯선 이들의 꿈을 보고 싶지 않은 마음, 어디를 둘러봐도 낯선 것, 나를 위한 것이 아닌 것들을 마주하게 되는 것에 대한 막연한 저항감일 수도 있지. 아니면, 수도의 지위를 잃고 쇠락하는 미인처럼 고개를 숙인 걸까? 아니면 영혼을 갉아먹는 희고 고통스러운 밤을 기다리며, 더 어둡게 잠들기 위해 유리창에 먼지를 쌓아두는 걸까? 혹은 잠꼬대처럼 가볍고 무섭지는 않지만 끈질긴 서울 특유의 광기일 수도 있을 거야. 내가 서울 친구에게 조심스럽게 왜 창문을 닦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잠시 침묵하더니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며 모호하게 대답했어. "아, 그냥 내 부엌에는 욕조가 있어…"

그것은 사실이었어. 욕조는 거대하고 차가운 부엌 한가운데, 아무것도 가려지지 않은 채 놓여 있었지만, 제 기능을 하고 있었지. 게다가 그 아파트는 —물론 여러 가구가 모여 사는— 무려 열두 명이 살고 있었고, 소문에 의하면 모두 그 욕조에서 몸을 씻었다는 거야. 어떻게 그랬는지는 나도 알 수 없어. 그리고 아마도 그건 꿈과 같았을 거야. 갑자기 인파 속에서 발가벗겨진 자신을 발견했지만, 복잡하고 뒤엉킨 어떤 이유 때문에 도무지 바로잡을 수 없는 상황처럼 말이야.

몽유병 환자들처럼, 서울 사람들은 옥상을 거닐지. 잘 정비된, 꽤 공식적인 길들도 있고, 작은 그룹으로 모여 하늘의 안내자와 함께 투어에 나서기도 해. 어떤 허공의 길들을 통해 집에서 집으로 건너가는 거지. 비공식적인 산책도 있어. 좁은 통로나 채광창, 다락방을 통해, 지붕의 용마루를 따라 걷는 거야. 깨어 있는 사람에게는 무서울 정도의 높이지만, 그들은 꿈속을 걷고 있으니 무섭지 않겠지. 그 높은 곳에서 그들은 물, 발코니, 동상, 라일락, 세 번째와 네 번째 마당, 멀리 보이는 첨탑들을 봐. 먼 곳의 첨탑들—어떤 것은 천사로 장식되어 있고, 다른 어떤 것은 작은 배로 장식되어 있지. 걸려 있는 빨래들, 기둥들, 먼지 쌓인 창문들, 창턱에 놓인 파란색의 울퉁불퉁한 냄비들, 그리고 날씨에 따라 회색이 되기도 하고 금빛이 되기도 하는 그 특별한 고층의 공기를 말이야. 그 공기는 길가의 낮은 곳에서는 결코 볼 수 없지. 내 생각에 그 공기는 항상 거기에 있었어. 7층 높이에 매달려 있었고, 도시가 전혀 없던 그 옛날에도 거기에 매달려 있었던 것 같아. 그저 충분히 높은 건물들을 지어 그곳에 닿았어야 했고, 그것이 저기 떠다니며 빛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어야 했고, 고개를 젖히고 위를 바라보았어야 했던 거지.

고개를 젖히지 않는다면 서울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아스팔트는 아스팔트일 뿐이고, 먼지나 물웅덩이, 고양이와 사람 냄새가 뒤섞인 끔찍한 빌라의 현관들, 쓰레기통들, 동네 구멍가게의 우유들. 하지만 2층 이상으로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면, 전혀 다른 도시를 발견하게 돼. 가면들, 화병들, 화환들, 기사들, 돌 고양이들, 조개껍데기들, 뱀들, 뾰족한 창문들, 꼬불꼬불한 기둥들, 사자들, 웃는 아기 얼굴이나 천사들의 모습이 아직 그곳에 살고 있어. 20세기 도살자들의 추격 속에서도 그들은 잊혔거나 미처 파괴되지 못했던 거야. 그중 한 주요 인물이 촉촉한 가을밤마다 도시를 맴돌며 숨어 지내다가, 우리 학교에서 배웠듯, 어느 비 오던 가을밤, 김미영이라는 여인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냈다고 해. 그녀는 열정적이었다고들 하지만, 어쩌면 전혀 열정적이지 않고, 그저 한강물로 세수하는 모든 사람처럼 창백하고 투명한 얼굴의 평범하고 어리석은 여인이었을지도 모르지.

새벽녘, 따뜻한 커피와 붉은 커런트 잼을 바른 하얀 롤빵으로 배를 채운 그는 빗속 안갯속으로 미끄러져 나가 권력의 중심으로 달려갔어. 희생자 명단을 작성하고,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손에 넣고, 자신이 짓지 않은 것을 부수고, 벽 장식을 깨뜨리고, 현관에 오물을 쏟아붓고, 레이스 커튼에 코를 풀고, 다른 이들의 꿈을 황폐하게 만들었어.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인들과 몽상가들을 총살했지. 과연 그는 김미영의 푹신한 오리털 이불 위에서 편히 잠들었을까, 아니면 파멸과 황폐함을 예감하며 밤새 뒤척였을까? 열정적인 김미영은 달콤한 잠을 잤을까, 아니면 총신처럼 차가운 사지를 가진 몽마에게 시달리는 늦가을 밤의 악몽에 시달렸을까? 이런 것들은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아.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단 말이야. 예를 들면, 꿈의 구성과 확산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어. 그런데 말이야, 어떤 꿈에서는 김미영이 또 다른 꿈을 꾸고 나서 (어떤 꿈인지는 건물 모퉁이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지만), 조용히 침상에서 일어나 얼굴 크기만 한 작은 베개를 들고는, 코 고는 끔찍한 손님에게 조용히 다가가, 살아있고 따뜻하며, 순수하고 부드럽고 아무것도 모르는 모든 존재들을 위해, 미래를 위해, 영원을 위해, 구슬 장미가 수 놓인 작고 단단한 베개를 그 몽마의 불그스름한 주둥이, 털 난 숨구멍, 콧물이 끓는 공기 통로, 씹는 틈새에 단단히 덮어 눌렀을 거야. 꼭꼭, 아주 꼭꼭 덮고 열정적인 몸으로 눌러 버린 거지. 그리고 허공에서 꿈틀거리던 촉수와 돌기들이 힘을 잃고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렸을 거야. 그렇게 도시는 구원되었겠지.

어떤 꿈도 흔적 없이 사라지지는 않아. 언제나 무언가 남아 있지. 단지 우리가 그 꿈이 누구의 것인지 알지 못할 뿐이야. 여름날 답답하고 뜨거운 지옥 같은 을지로 뒷골목에서, 골목 안 표지판의 글귀가 눈에 들어올 때: "매일 – 악어, 도마뱀, 파충류!"—무엇을 생각해야 할까? 누가 포트 와인에 절은 악몽 속에서 뒤척이며, 소매에서 초록색 악마들을 떼어내고 있었을까? 누가 이 절망적인 외침을 보냈을까, 어디서부터—환영처럼 나타난 아마존 강에서, 환영 같은 나일 강에서, 아니면 회색 한강 물줄기와 지하로 은밀히 연결된 이름 없는 다른 강들에서? 그리고 무엇으로 그를 도울 수 있을까?

누구도 아무것도 도울 수 없어. 단지 이곳에 살며, 자신만의 꿈을 꾸고, 아침마다 발코니 난간에 그 꿈들을 널어 말려야 할 뿐이야. 바람이 그 꿈들을 비눗방울처럼 어디든 날려 보내도록 말이지. 미루나무 꼭대기까지, 전차 지붕까지, 그리고 음모자들처럼 하얀 플록스를 들고 다니는 선택된 사람들의 머리 위까지. 그것은 재생의 비밀스러운 표식이니까.

1948년, 약사 김진우 씨는 여름에 도시 사람들에게 세를 놓으려고 별장을 지었어.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는 닭장 위에 방 두 개짜리 쪽방을 만들고, 텃밭이 보이는 전망을 즐겼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면서, 신선한 달걀과 오이들을 먹고, 직접 키운 발레리안 나물로 만든 약을 조금씩 팔면서 말이야. 6월에는 짐 보따리와 아이들, 제멋대로인 개를 데리고 올 세입자들을 맞이할 계획이었지. 하지만 하느님은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셨고, 김진우 씨는 세상을 떠났어. 그리고 우리, 세입자들이 그의 아내에게서 그 별장을 사게 되었지.

이 모든 것은 아주 오래전 일이라, 김진우 씨를 본 적도 없고, 그의 아내도 기억나지 않아. 사진들을 연대별로, 계절별로 부채처럼 펼쳐놓으면, 내 누이동생들과 형제들이 칭기즈칸의 군대처럼 미친 듯이 불어나고 성장하는 모습, 강아지가 늙어가는 모습, 그리고 김진우 씨의 아늑했던 살림집이 허물어져 명아주가 무성하게 자라는 모습이 보여. 닭장이 있던 자리에는 스키 7켤레와 셀 수 없이 많은 썰매가 쌓여 있고, 텃밭 자리에는 60년대 스타일의 하얀 새틴 브래지어와 알록달록한 팬티를 입은 어린 우리가 누워 햇볕을 쬐고 있었지.

1968년, 우리는 다락방에 기어 올라갔어. 거기에는 옛 지도자가 죽기 1년 전, 김진우 씨가 베어 놓았던 건초가 아직 남아 있었어. 그리고 커다란 상자 하나가 있었는데, 김진우 씨가 작은 약병들의 마개를 막으려고 모아둔 아주 작고 작은 코르크 마개들로 가득 차 있었지. 또 다른 상자는 단철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만져보니 안쪽이 끔찍하게 말라 있었어. 그 안에는 신기하게도 상복 색깔의 커다랗고 가벼운 펠트 부츠 여섯 켤레가 잘 보존되어 있었어. 펠트 부츠 아래에는 새처럼 자그마한 여인의 어두운 색 원피스들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고, 원피스 아래에는 이미 쿼크로 부서져 내리는 회색빛 노란 레이스들이 있었지. 그 레이스는 손가락으로 문지르면 가루가 되어 상자 바닥으로 흘러내렸는데, 그 바닥에는 시간이 빻아 흩뿌려 놓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어떤 정체 모를 먼지가 쌓여 있었어.

1980년, 딸기 농사를 시작한다고 흥분해서, 우리는 약사님의 낙원처럼 꽃 피고 열매 맺었다고 어렴풋이 기억하는 동네 어르신들의 말에 따라 정원 한 귀퉁이의 잡초들을 파헤쳤어. 어느 정도 깊이 파내려 가자 커다란 쇠붙이가 나왔어. 우리는 겁을 먹었고, 어르신들로부터 "전쟁 중에는 이곳까지 아무것도 날아오지 않았으니 포탄이 아니다"라는 말을 들었지만, 다시 겁이 나서 흙을 덮고 발로 단단히 다졌어. 아궁이를 고칠 때도 김진우 씨의 물건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어. 굴뚝을 바꿀 때도 마찬가지였지. 부엌이 마루 밑으로 내려앉고, 세면대가 닭장으로 굴러 떨어졌을 때, 우리는 잔뜩 기대했지만 헛수고였어. 완전히 새로운 굴뚝과 새 아궁이 사이에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남긴 거대한 구멍을 메울 때, 우리는 바지를 발견하고 기뻐했지만, 그것은 너무 오래전에 잃어버려서 즉시 알아볼 수 없는 우리 자신의 바지였어. 김진우 씨는 흩어지고, 분해되어, 땅속으로 스며들었어. 그의 세상은 이미 우리 세대 네 개의 세상이 버린 쓰레기로 오랫동안 단단히 뒤덮여 있었지. 그리고 색깔 있는 금속을 좋아하던 사람들이 훔쳐간 'M. A. YANSONъ'라는 표지판을 기억하지 못하고, 수백 개의 작고 작은 코르크 마개들을 서로에게 던지지도 않고, 쐐기풀 덤불 속에서 길 잃은 발레리안의 하얀 우산을 찾지도 않는, 기가 막히게 새로운 아이들이 이미 자라났어.

1997년 여름, 우리가 어리석게도 계산을 잘못하여 별장이 50주년이 된다고 착각하고,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초록색 화환 무늬가 있는 하얀색 벽지를 샀어. 우리는 생각했지. 벽에서 세면대가 떨어져 나가고, 선반에는 마른 유화물감 통들과 엉겨 붙은 못 상자들이 놓여 있는 그 후미진 곳을 베르사유로 만들자고. 궁전 분위기를 더욱 호화롭게 만들기 위해, 우리는 낡은 벽지를 벗겨내 합판이 드러나게 하고, 깨끗한 곳에 새로운 퐁파두르 스타일을 바르기로 했어. 유럽식 인테리어 리모델링이라면 리모델링이지.

하얀색에 초록색 체크무늬 아래에서는 하얀색에 파란색 잔물결 무늬가 나왔고, 잔물결 아래에서는 축 늘어진 자작나무 귀걸이가 달린 회색빛 봄기운이 도는 벽지가, 그 아래에서는 볼록한 하얀 장미 무늬가 있는 라일락색 벽지가, 라일락색 아래에서는 단풍잎이 빽빽하게 그려진 갈색빛 붉은 벽지가 나왔지. 단풍잎 아래서는 신문들이 펼쳐졌어. 서울과 부산 해방, 축하 불꽃놀이; 불꽃놀이 아래서는 "피에 굶주린 권력의 개들을 처형하라!"는 국민들의 요구; 그 개들 아래서는 위대한 지도자를 향한 애도 행렬. 그 지도자 아래서는 마치 풀 먹인 접착제로 칠하지 않은 듯, 갈리시아에서 찍힌 턱수염 짙은 늠름한 장교들의 단체 사진이 우리를 불안한 시선으로 응시했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모든 집단 무덤, 무덤, 무덤, 무덤 아래, 맨 밑바닥에는 우사틴 크림 광고와: "미국의 모든 상류사회는 오직 코키오 은방울꽃 차만을 마십니다. 강남 역삼동 21번지, 혜정상회"라는 문구, 그리고: "왜 나는 이렇게 아름답고 젊은가? — 박선주 여사, 무료 증정 및 발송"이라는 문구, 또: "담배 필터 지를 살 때 '좋은 필터지 한 통 주세요'라고 하지 마세요. '강산 필터지 주세요'라고 말하세요. 그래야만 찢어지지 않고, 구겨지지 않으며, 얇고 위생적인 필터 지를 받았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예, 필터 지는 오직 강산입니다."라는 광고들이 연이어 나왔지.


벽지를 찢고 구기기 시작하자, 우리는 그 낡은 풀 먹인 신문지처럼 부서지기 쉬운 시간의 겹들을 끊임없이 찢고 구겼어. 찢기 시작하자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지. 낡은 종이 아래, 겹겹이 쌓인 부풀어 오른 흔적들 사이에서 얇은 나무 부스러기가 쏟아져 나왔어. 나무 좀, 쥐, 김진우 씨, 나무벌레, 바구미 가족들이 기쁘게 마른풀 먹인 종이를 잔뜩 먹어치운 후 남긴 톱밥 가루와 먼지. 그들은 역사의 층층 사이, 누군가의 슬픔이 담긴 지각판 사이마다 미크론 단위의 공기층을 남겨두었지.

"문학은 단지 종이 위의 글자일 뿐"이라고들 말해. 아니, '단지' 그뿐만이 아니야. 비누 냄새와 썩어가는 나무판자 냄새가 나는 이 손 씻는 곳에는 약사 김진우 씨의 침실이 있었어. 소박하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작정이었던 그는 어린 시절부터 모아둔 신문지로 정성껏 벽지를 발랐어. 한 겹, 또 한 겹, 코르크 마개 하나하나까지, 아무것도 버리지 않고. 그 위에 또 벽지를 바르고 말이야. 분명 깔끔하고 단정했을, 이 땅에 뿌리내린 사람이었을 거야. 그는 아늑하고 사랑스럽게 침실을 꾸몄지. 사적인 공간, 무거운 빗장이 달린 두꺼운 문, 그리고 마루 밑에는 깨끗한 닭들이 있었어. 옆 칸의 작은 방에는 발코니가 있었고, 창밖으로는 노을이 지는 검푸른 소나무들이 보였어. 그곳은 식당 겸 거실이었어. 치커리 커피를 마시거나, 뻣뻣한 개신교 의자에 앉아 과거와 미래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겠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사라지지 않고 어떻게 약초를 키우고 있는지, 첫눈이 내리면 가벼운 검은 펠트 부츠를 신고 걸어갈 그 순간에 대해. 이제 그는 상자에서 그것들을 꺼내 신고 걸어가, 발자국을 남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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