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혼자다. 내 인생을 책임져야 한다.

by 필리소

이곳저곳 연락을 하며 줄리안에게 조금이라도 더 나은 상황을 만들어주기 위해 정신없이 뛰어다니다 보니 어느덧 며칠이 훌쩍 지나 주말이 되어있었다. 그레이스는 창밖의 따스한 햇살을 바라보며 결심한 듯 션에게 말을 건넸다.


"션,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줄리안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요. 벌써 며칠째 저렇게 방에 틀어박혀 폐인처럼 지내고 있잖아. 의사가 갈비뼈는 잘 아물 거라고 했으니, 오늘은 햇볕이라도 쬘 겸 공원에 가서 좀 걷는 것도 괜찮을 거예요."


션은 그레이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좋아. 줄리안 옷도 좀 사고, 편하게 신을 수 있는 신발도 몇 켤레 더 사주죠. 아, 그러고 보니 줄리안 짐은 아직도 전에 살던 그 집에 그대로 있네. 당장 이번 주말에 줄리안 짐을 전부 다 옮겨 놓을까? 어차피 앞으로는 여기서 우리와 함께 살게 될 테니.”


그레이스와 션은 어떻게 해서든 줄리안을 방 안에서 데리고 나오려고 마음을 먹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햇볕이 좋으니 함께 밖으로 나가서 줄리안의 기분 전환을 해줘야지.. 마음먹으며 줄리안이 칩거하고 있는 방으로 가기 위해 거실로 나왔다.


“어? 줄리안!”


며칠 동안 굳게 닫혀있던 방문이 열리고, 줄리안은 고립되어 있던 방에서 나와 거실소파에 앉아 있었다.


"일찍 일어났네, 줄리안." 그레이스는 놀란 얼굴은 감추고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잘 잤니? 컨디션은 좀 어때? 생각해 보니 어제저녁도 얼마 안 먹었던데. 우리 오늘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마침 주말이기도 하니, 브런치라도 먹으러 다 같이 나가자." 그녀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줄리안에게 말을 걸었다.


그에 반해 어두운 표정을 감추지 못한 줄리안은 그레이스와 션의 눈을 차분히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선생님, 저… 다시 돌아갈게요."


"응?" “뭐?”

션과 그레이스는 줄리안의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저, 살던 집으로 돌아갈게요."

줄리안의 목소리는 더욱 작아졌지만, 그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


"뭐, 뭐?" 션은 줄리안의 말에 깜짝 놀라 되물었다. "뭐라고? 그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안 돼. 그건 안 돼, 줄리안!" 그는 격앙된 목소리로 줄리안의 말을 부정했다.


줄리안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선생님도 잘 아시잖아요. 이 작은 시골 동네는 고아가 된 동양 입양아의 말을 믿어주지 않아요. 살던 집주인아저씨는 이 지역 유지들과도 친분이 깊다고 들었어요. 사람들은 갈비뼈가 부러지고 멍이 든 얼굴로 폭행을 당했다고 우는 아이의 말보다는, 갈 곳 없는 불쌍한 아이들을 돕는다고 알려진 그 남자의 말을 더 믿을 거예요." 줄리안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 줄리안." 그레이스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줄리안의 이름을 불렀지만 더 이상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전 괜찮아요." 줄리안은 그레이스와 션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다시 돌아갈게요. 이제 더 이상 선생님들께 짐이 될 수는 없어요." 그의 목소리는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그의 결심은 확고해 보였다.


"짐이라니, 그게 무슨…" 그레이스는 줄리안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그건 안 된다, 줄리안!" 감정이 격해진 션이 줄리안의 말을 잘랐다. 그는 줄리안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감싸 안고 다정하게 말했다.


"줄리안, 우리는 이미 너의 보호자가 되겠다고 서류 신청을 해 놓았어. 절차가 복잡해서 시간이 조금 더 걸리고 있을 뿐이야. 조금만 더 기다려주렴." 션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보호자 허가증이 나오기 전까지, 네가 원하는 곳에서 지낼 수 있어. 아무도 너를 그 끔찍한 집구석으로 보내지 않아. 그러니까, 우리랑 같이 있자. 오늘 당장 짐을 가지러 가자꾸나."


그러나 줄리안은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채,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의 얼굴에는 굳은 결심이 어려 있었다.


"저는... 다시 그 집으로 돌아갈게요." 줄리안의 목소리는 작게 떨렸지만, 그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저도 가기 싫지만... 그게 모두에게 좋을 것 같아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레이스와 션은 당황한 표정으로 줄리안을 바라봤다. 그들은 줄리안의 진심을 알고 싶었지만,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줄리안은 슬픈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부탁했다.

"선생님... 저를 그 집에 데려다주세요."


그의 부탁에 그레이스와 션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어떻게 그 끔찍한 곳으로 다시 돌아가겠다는 걸까? 그들은 줄리안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었다.


"줄리안..." 그레이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니?"


그녀의 질문에 줄리안은 침묵했다. 그리고 줄리안의 입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줄리안의 고민]


줄리안은 지난 며칠 내내 생각을 했다.

최악의 상황이란 게 이런 거구나.


이유도 없이 갈비뼈에 금이 가도록 구타를 당했다. 많이 대들지도 않았고 격렬히 저항하지도 않은 채 때리는 대로 맞고 그 길로 집을 나온 게 전부다. 그렇게 비참하던 그날, 비가 오던 날, 죽고 싶었던 그날의 안 좋았던 운을 뒤집기라도 하듯 특별한 사람들을 만나는 경험을 했고, 그레이스 선생님과 션 선생님의 집에 와서 쉴 수 있게 되었다. 낮에는 나쁜 어른에게 시달리고 밤에는 좋은 어른들을 만나게 되었더니, 그렇게 도움을 받다 보니 자신의 이 거지 같은 상황도 어쩌면 나아질지 모르겠다는 작은 희망을 품었었나 보다.

그러나 세상은 고아가 된 입양아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정작 억울한 건 자신인데 몇 주 사이에 자신은 순수한 위탁 가정의 남자를 모함한 영악한 아이가 되어있었다. 부모 잃고 갈 곳 없는 아이를 돌봐준 사람의 뒤통수를 쳐버린, 은혜도 모르는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렸다.

이미 배은망덕하다고 동네에 소문이 난 사춘기 동양인 고아를 누가 받아줄까?

아무도 없겠지.


그레이스 선생님은 함께 지내자고 하셨지. 그러나 이 작은 타운에서 이미 거짓말쟁이로 낙인찍힌 아이의 편을 들며 계속 싸우신다면 그레이스 선생님 부부는 이 동네에서 점점 미움을 받게 될 테지.

선생님들께 폐가 될 수는 없어.


그러나 …

난 갈 곳이 없다.

그레이스 선생님 집에 살지 않으면 그 남자 집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그 집에 다시 돌아가는 것은 죽을 만큼 싫지만 선생님들이 계속해서 나를 위해 법정 싸움을 해 가시는 것은 안될 일이었다.


구타를 당하고 집을 나와 빗 속을 걸으면서 트럭에라도 뛰어들어 죽으려고도 했었다.

‘차라리 그때 죽었으면 불쌍한 아이 취급은 받을 수 있었겠지. 그리고 아무에게도 짐이 되지 않았겠지. 이렇게 계속 억울한 아이로만 지낸다면 선생님들은 나를 도와주시느라 소송을 포기하지 않으실 거야.’



줄리안은 며칠 동안 방 안에 틀어박혀 치열하게 생각을 거듭했다. 방 안의 공기는 무거웠고 고요한 정적은 줄리안의 생각을 날카롭게 만들어 줬다. 그의 머릿속은 마치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바다처럼 혼란스러웠지만, 그 혼란 속에서 희미하게나마 보이는 길을 찾아야만 했다.


온 힘을 다해 생각한 후 결론이 났다. 혼자서 해내야 한다.

혼자서 이겨내자는 결론이 나자 마음이 홀가분 해졌다.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충분히 생각을 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 남자가 살고 있는 집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하리 만큼 싫었다. 그곳의 공기, 그 남자의 시선, 그리고 그 집에 스며든 기억들까지 전부가 싫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이번에 돌아간다면, 무작정 당하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줄리안은 이를 악물었다.


문득, 창고 건물에서 사라져 버린 여자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 버텨.’

단 한 마디였지만, 그 말은 그의 가슴에 깊게 박혀 있었다.


그날 창고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씩 떠올랐다. 그들을 본 것은 단순한 환상이나 꿈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은 점점 더 선명해졌다.

‘샤칼 찰라흐? 그렇게 불렀었지…그 남자의 이름일까? 아니.. 무슨 주문 같은 느낌이었는데…’

그 주문을 떠올리는 순간, 그날의 감각이 되살아났다. 세 명 중 한 남자가 자신의 머리에 손을 올렸을 때, 온몸을 관통했던 짧고 강렬한 전율까지 생생했다.


‘무슨 선물을 주는 거라고 했지… 그러면서 의지를 놓지 말라고 했어. 다 잘될 거라고.’

그 말들은 마치 지푸라기처럼 그의 마음속에 매달렸다. 믿고 싶었다. 아니, 믿어야 했다. 그리고 명함을 건넸던 여자의 목소리도 다시금 귓가에 맴돌았다.

죽지 마.

그녀의 말은 단순한 부탁 같았지만, 지금의 줄리안에게는 마치 생존을 위한 명령처럼 들렸다. 샤칼 찰라흐 라는 주문 같은 말이 줄리안의 머릿속을 맴돌자 줄리안이 했던 며칠간의 치열한 고민들이 순식간에 정리가 되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줄리안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하나씩 떠올리며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치열하게 고민할수록 혼란스러웠던 머릿속이 점차 맑아졌다.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

중학생인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는 사실을.


그러나 이상하게도 좌절감 대신 의지가 솟아올랐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은 건 내가 아직 어리기 때문이야. 하지만 내가 어리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도 분명히 있을 거야.’


줄리안은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자신이 직면한 상황은 점점 더 명확해졌다.

“나는 미성년자이고 보호자가 필요해.”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그는 스스로에게 말을 걸며 퍼즐 조각을 맞춰갔다.

“그리고 그 남자는 내가 다시 그 집으로 들어오길 바란다고 공공연히 말했어.”

주인아저씨. 기다려라. 이번에 돌아가면 전처럼 당하지만은 않을 거야.


왜일까? 왜 눈엣가시 같은 자신의 보호자가 되겠다고 말을 한 걸까?

줄리안은 이 의문을 가지고 지난 며칠간 그레이스 선생님 집의 작은 방에서 끓임 없이 고민을 했다.

자신을 아동폭행으로 고소해서 재판까지 데리고 갔던 줄리안이다. 그 남자에게 자신은 시한폭탄 같은 존재일 텐데, 왜 그런 말을 했던 걸까? 혹시 자신이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게 확실하다고 판단하고, 자신의 이미지를 관리하려는 속셈일까?


가능성은 있었다. 그러나 만약 자신이 갈 곳이 없어 그 집으로 돌아간다면? 그 남자는 자신을 거부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할 것이다. 그런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이미지 관리를 하는 남자는 아니다. 이 남자는 정말 자신이 돌아와도 괜찮은 거다. 안 돌아온다면 이미지라도 챙기겠고 만일 내가 돌아간다면.. 자기에게 무슨 이득이 있는 거지?


줄리안의 눈빛은 점점 날카로워졌다. 그의 머릿속은 멈추지 않고 돌아갔다. 생각의 실타래는 끝없이 이어졌고, 하나의 의문이 또 다른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던 중, 줄리안의 머릿속에 갑작스러운 생각이 스쳤다.


‘그런데, 내가 그 집에서 나가는 게 과연 그 남자에게 좋은 일일까? 혹시 내가 그 집에 있으면 그 남자에게 이익이 되는 게 아닐까?’


줄리안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다시 되짚어 보았다. 재판은 그 남자의 거짓말에 손을 들어주었고, 덕분에 그는 "좋은 사람"이 되었으며, 자신은 "문제아"라는 낙인이 찍혔다. 이미 모든 상황이 그 남자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나는 그 남자에게 다루기 쉬운 아이였잖아.’

줄리안은 이를 악물었다. 자신은 때리면 맞아주었고, 나이에 비해 덩치와 키가 커서 집안의 모든 잡일을 떠맡았다. 게다가 정부에서 매달 지원금을 가져다주는 존재였다. 그런 아이를 놓친다면.. 이미지도 잃고 돈도 못 버는 거잖아?


줄리안은 그 남자가 정기적으로 하는 일이 없어 보였다는 점도 떠올렸다. 그는 아마 아이들을 위탁받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정부에서 지원금과 세금 혜택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만약 내가 다시 돌아간다면, 그는 나를 거부하지 않을 거야.’

줄리안은 확신했다. 정부에서 주는 돈과 세금혜택뿐만 아니라 위탁부로서의 이미지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그 남자는 자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줄리안의 생각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만약 그레이스와 션 선생님 집에 머물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를 상상했다.

‘나에게는 좋은 일이겠지.’

그러나 동시에 그는 걱정했다. ‘그분들에게는 문제가 될지도 몰라.’

그레이스 선생님과 션 선생님이 문제아를 감싸는 사리 분별없는 사람들로 낙인찍힐 가능성을 떠올렸다.


줄리안은 결정을 내렸다. 돌아가자. 하지만 이번에는 전처럼 순순히 당하는 아이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이미 법이 자신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이제부터 나는 내가 책임진다.’


줄리안의 눈빛이 단단해졌다.

‘어차피 법은 내 편을 들어준 적이 없었잖아. 처음 있는 일도 아닌데 뭘.’

그의 마음속에는 더 이상 두려움 대신 결연한 의지가 자리 잡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세상이 무섭고 죽고 싶었던 자신이었는데 어쩐 일인지 자신의 생각에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주인아저씨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전처럼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가.. 왜 이렇게 괜찮지?’


양부모의 죽음 이후, 파양 문제로 몇 차례의 재판을 치르며 그는 이미 좌절과 불공평을 뼈저리게 경험했었다. 하지만 경험을 해봤다고 해서 쉬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 과정에서 어른들의 이중성과 법의 무력함을 절실히 깨달았다. 양아버지의 동생이라는 남자와 한국에서 온 삼촌은 겉으로는 서로 대립하는 척했지만, 사실은 같은 편이었다는 것을 줄리안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줄리안, 너를 위한 소송이야. 내가 네 가족이야. 꼭 너를 되찾을 거다.’

한국에서 온 삼촌이라는 사람은 그렇게 말하며 재판에서 승소했다. 그러나 그가 한 일이란 줄리안의 몫으로 받은 돈을 모두 들고 두 달 만에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때도 그랬었다. 그리고 또 이번에도 폭행한 주인아저씨는 무죄를 받았다. 줄리안은 법이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웠다. 파양은 이미 마무리되었고, 혼자 남겨진 줄리안에게 돌아갈 집은 없었다. 두 번의 경험으로 어린 줄리안은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법을 믿지 않게 되었고, 어른들에게 받은 상처로 마음을 닫아버린 사춘기 소년이 되었다.


‘나는 혼자다.’

그 생각은 차갑고 단단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혼자라는 생각이 명확해지자 오히려 모든 것이 선명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는 내가 혼자 해내야 한다. 이렇게 억울한 상황에 놓이는 건 이번이 마지막 이어야 해.’

줄리안은 결심했다. 정면 돌파하기로.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자신감이 생겨났다. 몇 시간 동안 쉼 없이 생각에 빠져 있던 줄리안은 문득 자신에게서 낯선 감정을 느꼈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자신의 생각에 믿음이 생기는 감정이었다. 이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며칠 전만 해도 나쁜 어른들에게 배신당해 죽고 싶었던 자신이 이제는 뭔가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자신이 아직 어리고 아는 것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상황 속에서 맞설 무기가 하나쯤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 창고에서 만났던 남자가 떠올랐다.

‘샤칼 차하르..’ 도대체 무슨 말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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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안, 이쪽으로 들어가는 게 맞니? 도무지... 입구가 보이질 않네."


고집을 부리는 줄리안을 데리고 결국 다시 이 집에 온 그레이스 선생님의 목소리는 짜증이 섞여있었다. 줄리안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한 달 만에 돌아온 '집'은 변한 게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황폐해진 것 같았다.


넓은 터에 자리 잡은 오래된 이층 집이 눈에 들어왔다. 본채 외에도 작은 헛간과 두 대의 차가 간신히 들어갈 법한 차고가 보였다.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진 나무 기둥은 이제 완전히 부서져 있었고, 무성한 잡초들이 마치 집을 삼키려는 듯 기어올라가고 있었다.


'여전하구나.' 줄리안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차가 천천히 집 안으로 들어섰다. 줄리안은 긴장된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평소 같았으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창문 틈새로 고개를 내밀었을 다른 위탁 아이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방 안에만 있나 보네.'


차에서 내린 줄리안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을 향해 걸어갔다. 그때, 차고 앞에서 들리는 둔탁한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남자가 장작을 패고 있었다.


땀에 젖은 등줄기, 힘주어 내리치는 도끼, 그리고 쪼개지는 나무의 소리. 줄리안은 잠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내가 없으니 직접 장작도 패는구나.'


줄리안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그는 이제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더 이상 순순히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단단한 결심이 자리 잡고 있었다.


"줄리안, 들어가자." 션 선생님의 목소리에 줄리안은 정신을 차렸다.


"아 씨, 나무가 뭐 이렇게 단단해? 젠장. 도끼는 또 왜 이리 무뎌? 방구석에 있는 것들은 다 콩알만 해서 이걸 내 손으로 다 쪼개야 하다니."

남자는 투덜거리며 장작을 패고 있었다. 날카로운 도끼날이 나무를 파고들 때마다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의 얼굴에는 짜증과 피로가 가득했다. 그러다 문득, 차가 집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자 손을 멈췄다.


"응? 누구?"

남자는 고개를 들어 차를 바라보았다. 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보자 그의 눈이 커졌다.


재판에서 봤던 학교 선생님 둘, 그리고 그들 사이에 서 있는 줄리안이었다. 한 달 전 떠났던 아이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남자는 놀라움이 담긴 눈빛으로 줄리안을 바라보다가 곧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의 시선은 줄리안을 꿰뚫어 보려는 듯 날카로웠다.


남자는 장작을 패던 도끼를 옆으로 던져놓고 천천히 줄리안 쪽으로 걸어왔다.

"여~ 줄리안! 잘 지낸 모양이로구나."

그의 목소리는 겉으론 반가운 척했지만, 그 속에 담긴 비꼬는 기색은 숨길 수 없었다.


저벅, 저벅.

남자의 발소리가 가까워지자 션 선생님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는 줄리안을 뒤로 밀며 남자와의 거리를 좁혔다.


"션입니다. 줄리안 학교 선생이에요." 션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초면은 아니죠? 할 얘기가 있어서 왔습니다. 좀 들어가겠습니다?"


션의 태도는 흔들림이 없었다. 남자는 잠시 멈칫하며 션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더 이상 다가오지 못했다. 션이 말끝을 맺기도 전에 그는 이미 앞장서서 집 쪽으로 걸어갔다.


문은 열려 있었다. 낡은 경첩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션과 그레이스 선생님, 그리고 줄리안이 차례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은 한 달 전과 다를 바 없었다. 낡고 어두운 공기, 오래된 나무 냄새, 그리고 무언가 눌린 듯한 침묵이 여전히 공간을 지배하고 있었다. 줄리안은 익숙한 이 분위기에 다시금 숨이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위탁 아이들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방 안에 틀어박혀 주인의 눈치를 보고 있을 것이다.


줄리안은 조용히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여전하구나.'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그는 이제 예전처럼 당하기만 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의 눈빛에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현관 입구는 마치 폭탄이 터진 듯 어지러웠다. 여기저기 빨랫감이 뒹굴고 있었고, 입구에서 보이는 부엌은 언제 정리를 했는지 모를 잡동사니들로 가득했다. 설거지하지 않은 접시와 반쯤 비워진 컵들이 싱크대와 테이블을 점령한 채 방치되어 있었다. 그레이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속으로 부글거렸다.


‘돈을 받고 아이들을 보살피는 사람이 집안 청소도 하지 않고!’


그녀는 마음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누르며 입구를 둘러보았다. 앉을 만한 자리를 찾으려 했지만, 모든 소파와 의자는 빨랫감이나 쓰레기로 뒤덮여 있었다. 결국 그녀의 시선은 부엌의 커피 테이블로 향했다. 테이블 위에는 먹다 남은 피자 조각과 기름 묻은 종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레이스는 한숨을 쉬며 피자 조각들을 대충 옆으로 밀어내고 의자에 앉았다.


그 순간, 현관문이 열리며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다소 황당한 표정으로 집 안을 둘러보더니, 곧 커다란 몸집을 흔들며 부엌으로 들어섰다. 그의 눈길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세 사람에게 멈췄다. 그레이스와 션 선생님, 그리고 줄리안이었다.


남자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들을 노려보았다. 그의 시선은 특히 줄리안에게 오래 머물렀다. 눈빛에는 놀라움과 불쾌함이 섞여 있었다. 줄리안을 데리고 온 두 선생님을 본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복잡한 생각들이 스쳐갔다.


‘그래, 무슨 말을 하려고 온 건지 들어나 보자. 재판은 이미 끝났어. 항소라도 한다면 명예훼손으로 맞받아칠 테다. 겁도 없는 꼬맹이.’


남자는 장작을 패던 손에 들린 도끼를 현관문 옆에 툭 내려놓고 천천히 걸어왔다. 그의 뚱뚱한 배가 앞으로 불쑥 튀어나와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흔들렸다. 그는 커피 테이블로 다가와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의 몸집이 차지하자 좁았던 테이블 공간은 더욱 비좁아졌다.


션 선생님은 줄리안을 보호하듯 앞으로 나섰다. 그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션입니다. 줄리안 학교 선생이에요.”

션의 말투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남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어 말했다.

“초면은 아니죠? 할 얘기가 있어서 왔습니다.”


남자는 션의 태도에 잠시 당황한 듯했지만, 곧 입술을 삐죽이며 뒤로 물러섰다. 그는 대답 대신 무언가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줄리안이 선생 둘을 데리고 집으로 올 거라고 생각을 못했던 남자는 무슨 말이 오갈지 몰라 먼저 입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줄리안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위탁 아이들은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마도 방 안에서 주인의 눈치를 보고 있을 것이다.

줄리안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여전하구나.’


꽝!

션의 주먹이 커피 테이블을 강하게 내리쳤다. 낡은 테이블이 충격으로 흔들리며 위에 놓인 컵과 접시가 덜컹거렸다.


"션!"

그레이스가 깜짝 놀라며 테이블을 붙잡았다. 그녀는 남편을 올려다보며 당황한 얼굴로 외쳤다. 션의 얼굴은 분노로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의 거대한 체구가 일어서며 방 안의 공기를 압도했다.


"이런 뭣 같은 상황이 말이 돼?" 션이 낮고 굵은 목소리로 으르렁댔다. 그의 분노는 방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애가 학대를 받아서 골절이 생기고,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됐는데, 때린 인간이 오히려 억울하다고 변호사를 사? 판사에게 뇌물을 줘?"


션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방 안을 울렸다. 그레이스는 안절부절못하며 그의 팔을 붙잡았다.

"션, 허니. 제발 진정해." 그녀는 조용히 속삭였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묻어났다. "줄리안이 보고 있어."


그녀의 말에 션은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그는 옆에 서 있는 줄리안을 힐끗 보았다. 줄리안은 조용히 서 있었지만, 그의 눈에는 무언가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방 한쪽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내가 때린 걸 본 사람도 없고, " 남자는 말을 더듬으며 뒷걸음질 쳤다. 그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저 영악한 애가 어디서 맞고 와서 나한테 뒤집어씌우는지..."


남자의 말을 들은 줄리안의 표정이 단단해졌다. 그는 남자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 시선에 남자는 당황하며 눈을 피했다. 그의 입술은 떨리고 있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다.


션은 그 모습을 보며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의 그림자가 남자를 덮쳤다.

"뭐라고?" 션의 목소리가 낮아졌지만, 그 안에는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그 입 안 닫아?"


남자는 움찔하며 물러섰다. 그러나 션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남자를 향해 손가락을 뻗으며 말했다.

"당신 아버지와 판사가 동창이라는 거 다 알고 있어." 션의 말투는 차갑고 날카로웠다. "당신 오늘 내 손에 뼈가 부러질 때까지 한 번 맞아볼래? 내가 당신이 했던 것처럼 증거 불충분으로 법망에서 빠져나가는 거 한번 보여줘?"


남자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뭐... 뭐라고? 당신 이거 협박이야! 내 집에 막 들어와서 나를 협박하는 거... 이거 범죄인 거 알아?"


남자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억지로 자신감을 유지하려는 듯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션은 그런 남자의 모습을 보고도 물러서지 않았다. 평소에는 온화하고 침착했던 션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분노로 눈앞에 보이는 것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방 안의 분위기는 얼음처럼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레이스는 숨을 죽이며 남편과 남자 사이에서 어떻게든 긴장을 풀어보려 했지만, 두 사람 사이의 긴장감은 점점 더 고조되고 있었다.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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