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에 쫓기는 부랑자들
2011, 김태용 / 드라마, 로맨스 / 1시간 53분
수인번호 2537번 애나. 7년 째 수감 중, 어머니의 부고로 3일 간의 휴가가 허락된다. 장례식에 가기 위해 탄 시애틀행 버스, 쫓기듯 차에 탄 훈이 차비를 빌린다. 여자들에게 에스코트 서비스를 하는 그는, 누군가로부터 도망치는 중이다. 훈은 돈을 갚고 찾아가겠다며 억지로 시계를 채워주지만 애나는 무뚝뚝하게 돌아선다. 돌아가 버릴까? 애나는 발길을 돌린 터미널에서 훈을 다시 만난다. 그리고 장난처럼 시작된 둘의 하루. 이름도 몰랐던 애나와 훈. 호기심이던 훈의 눈빛이 진지해지고 표정 없던 애나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오를 때 쯤, 누군가 훈을 찾아 오고 애나가 돌아가야 할 시간도 다가오는데... (출처 :왓챠피디아)
오프닝 시퀀스. 저 멀리서 애나(탕웨이 분)가 걸어온다. 카메라는 그 움직임을 느릿하게 롱테이크로 담는다. 얼굴이 흉한 얼룩으로 짓뭉개지고 거의 누더기가 된 옷을 입고 걸어오는 이 여자에게는 어떤 기구한 사정이 있을까. 그런데 여자는 걸어오다 말고 문득 자신이 왔던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한다. 지긋하던 카메라도 덩달아 뛴다. 영화는 시간을 점핑해 살인 현장으로 단숨에 도달한다. 애나가 걸어오는 지루한 첫 쇼트는 무효가 되었다. 애초에 이렇게 단숨에 돌아올 거라면 왜 김태용은 첫 쇼트에서 우리에게 인내심을 요구한 걸까.
김태용은 여기서 ‘자, 나는 시간에 관한 영화를 만들 거예요.’라고 선언한 셈이다. 애나가 정신없이 달려가는 짧은 쇼트 몇 개로 첫 쇼트가 무의미해졌듯, <만추>는 켜켜이 쌓아온 시간들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혹은 바꿔버릴 ‘순간’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의 제목을 다시 한 번 상기해보자. ‘만추(늦가을)’은 특정 인물이나 사건이 아닌, 하나의 순간(시점)을 정의하는 단어다. 남자와 여자는 우연히 늦가을에 시애틀에서 만났다. 그들에게 잡다한 우여곡절이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들은 쫓아오는 시간에 삶을 잠식당하는 부랑자들이다.
훈은 애나와의 첫 만남에서 시계를 준다. 72시간을 어기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시간을 확인해야 할 애나에게는 다소 야속한 선물이다. 가뜩이나 시간이 가는 것도 서러운데, 훈은 놀리기라도 하듯 몇 시냐고 계속 묻는다. 그런데 목적은 단순하다. 훈이 첫 번째로 시간을 물어봤을 때, 그 목적은 시애틀까지 남은 시간을 가늠해보는 거였다. 훈에게 시간이란 단순한 물리적/시공간적 좌표다. 그는 순간을 그저 유희하며 날려 보내는 사람이다.
반면 애나에게 삶이란, 시간이란 즐길 대상이 못 된다. 그녀는 짧은 순간마저도 여전히 두렵다. 왜냐하면 그녀는 순간의 실수로 파멸을 맞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훈이 그 어떤 삶의 필연적 고통을 모른 체 하고 날려 보내는 사람이라면, 애나는 삼키는 사람이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왜 애나는 그 종이들을 삼켜야 했을까? 이 동작은 애나가 교도소에서 나와 버스를 기다리는 장면에서 교묘하게 되풀이된다. 다시 세상으로 나가는 것에 대한 초조와 긴장. 그러나 그녀는 내색하지 않고 감자 칩을 삼킬 뿐이다. (아마도)그녀의 마음 한 구석에 깊게 내재되어 있을 여러 가지 감정, 증오, 분노. 그러나 그녀는 말할 생각이 없다.
훈과 애나는 범퍼카를 타다 멈추고 그들만의 연극을 시작한다. 애나는 드디어 자발적으로 입을 연다. 이 장면은 귀엽고 아름답다. 그런데 동시에 슬프다. 그들은 왜 다른 사람의 입을 빌려 말해야 했을까. 김태용은 바로 다음 장면에서 이유를 말해준다. 그것은 그들이 유령과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들은 죽음에서 그다지 멀지 않다. 애나는 사람을 죽였고 어머니의 죽음 역시 곁에 있다. 훈은 자신을 ‘죽일’ 거라고 협박하는 의문의 남자에게 쫓기고 있다. 훈과 애나는 죽음과 함께하면서, 순간순간을 연명하며 부유하는 유령들이다.
거의 시한부와도 같은 잔혹한 시간과 어느 것 하나 친절하지 않은 머나먼 타국에서, 사연 많은 유령들은 이제 결정해야 한다. 시간을 붙잡을 것인가?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이미 사랑에 빠져 버렸다. 그렇다면 그들이 다시 인간으로 돌아가는 방법은 딱 하나,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는 거다.
스쳐가는 순간들을 시간에 그저 실어 보내던 훈은 모텔에서 다급하게 애나를 찾는다. 처음에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시간이 아니라 시계라는 사물 그 자체였다(“이 시계는 나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어요.”). 훈이 경찰에게서 도망치기 전 애나와 그야말로 필사적인 키스를 나눌 때, 훈은 ‘당신이 나올 때’ 이곳에서 만나자고 구체적인 ‘시점’을 명시한다. 예전과 같았다면 한낱 추억으로 치부했을 애나와의 인연을, 그는 붙잡으려 한다.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는 건 애나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훈에게 힘겹게 말을 꺼낸다. 훈과 왕징이 식당에서 우스꽝스러운 포크 소동을 벌였을 때, 여느 때였다면 그저 지나쳤을 그녀가 울분을 토해낸다. 도망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던 이 영화의 애나는 마지막 장면에서 훈을 기다린다. 도피와 기다림은 상반되는 행위다. 훈과 애나는 서로에게 영혼의 촉매다. 그들은 기구했던 운명을 뒤로하고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다. 아니, 다시 시작해야 한다. 훈이 애나를 보내려다 결국 애나를 따라 버스에 탑승해 애나에게 처음 만난 것처럼 태연하게 말을 걸 때, 애나는 잠시 놀라지만 이윽고 훈의 연극을 유연하게 받아준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잃어버린 시간이 너무 많고, 남아 있는 시간은 너무 적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시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애나는 그 간절한 가능성을 붙잡고 2년 후에 훈을 기다린다. 훈은 과연 나타날까. 세상은 과연 갈 곳 잃은 유령에게 손을 내어줄까. 애나의 마지막 대사 “안녕, 오랜만이에요”는 어쩌면 다시 돌아온 세상을 향해 내뱉는 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사람은 관객뿐이다. 김태용은 여기서 결정의 몫을 우리에게로 돌린다. 당신은 어떻게 순간을 보내고 있냐고 질문한다. 그리고 그 질문은 어쩌면 영원히 메아리칠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