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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을 색다르게 즐길 수 있는 영화 세 편

by 낙타

겨울. 한 해의 마지막 의례. 좋았던 일들도, 슬펐던 일들도, 자랑스러웠던 성과도, 쓰라린 실패도 모두 뒤로한 채, 어찌됐든 또 다시 1년을 살아냈다는 사실에 스스로를 대견스럽게 여기는 시기. 크리스마스와 캐롤, 파티의 계절이면서, 혹독한 추위와 비정한 바람의 계절. 그래서 영화에서 겨울을 다루는 방식은 두 가지로 양분된다. 첫째는 연말 분위기 물씬 나는 따뜻한 로맨틱코미디 혹은 가족영화, 두 번째는 겨울의 계절적 특성을 활용한 재난영화 혹은 SF영화. 오늘 소개할 영화들은 이 두 개의 범주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는 영화들이다. 각자 고유하고 독창적인 방식으로 겨울의 질감과 향기를 스크린에 구현한 영화들이다.


1. 이다

2013, 파벨 파블리코프스키 / 드라마, 로드무비 / 1시간 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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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폴란드에서 펼쳐지는 간단한 이야기. 고아원에서 자라 곧 수녀가 되는 것을 앞둔 소녀 '이다'는 자신도 그 존재를 몰랐던 혈육인 이모 '완다'를 찾아가게 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부모와 부모의 죽음에 얽힌 충격적인 진실들을 알게 된다. 그 진실은 과연 무엇이며, '이다'의 삶은 어떻게 변하게 될까? 소녀는 폭설이 내리는 겨울 속으로 두렵지만 간절한 발걸음을 내딛는다.


<이다>는 단 하나의 불필요한 장면도, 감정의 과잉도 없이, 한 인물을 맑은 시선으로 고요히 응시하는 차분한 접근법이 돋보이는 영화다. 정사각형에 가까운 화면비와 인물의 얼굴을 프레임 가장자리에 위치시키는 독창적인 구도는 세상의 공백 속에 외로이 선 인물을 효과적으로 담아내고, 빛과 그림자를 세심하게 조절한 촬영과 흑백 화면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하지만 <이다>의 정말로 탁월한 지점은, 이야기와 화면이 조응하는 역설적인 방식에 있다. 영화는 '이다'의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충격적인 사실과 비극적인 진실 앞에서도, 잔인하게도 그 모든 것들을 그저 고요하고 투명하게 바라본다. 그 결과 '이다'의 삶이 내포한 비극성은 더욱 차갑고 날카로워진다. <이다> 속 겨울은 거짓된 희망이나 무책임한 낙관이라곤 전혀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새하얀 여백과 소리없는 폭설 아래로, 치유할 수 없는 냉기가 스며드는 곳이다. <이다> 속 겨울은 상처를 응시하는 계절이다.


2. 인사이드 르윈

2013, 코엔 형제 / 코미디, 드라마, 음악 / 1시간 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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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간단한 이야기. 함께 노래하던 듀엣이 자살한 후, 혼자가 된 뮤지션 '르윈 데이비스'는 무일푼에 기타 하나만을 들고 오디션으로 향하는 기나긴 여행길에 오른다. 우연히 떠안게 된 고양이 한 마리가 그를 위로해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점점 더 낮은 곳으로 향하는, 암울한 로드무비. 마침내 오디션을 본 후, 그의 삶은 변화했을까? 그는 조금 더 나은 삶을 살게 될까?


가난하고 쓸쓸한 포크 뮤지션의 로드무비. 다들 알다시피, 가난과 고독은 춥고 건조한 겨울에 더욱 쓰라린 고통을 우리에게 안겨준다. 입김을 내뿜으며 눈 쌓인 거리를 걸어가는 주인공 르윈을 보다보면, 그 추위가 뼛속까지 깊이 와닿는 것만 같다. <인사이드 르윈> 속 겨울은 가난과 고독의 계절이다.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고독하고 가난한 뮤지션의 행적을 그저 담담하게 따라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자연스레 우리의 삶에서 가장 추웠던 겨울을 떠올리게 된다. 인간 세상의 부조리함을 냉소적인 유머로 표현해오던 코엔 형제는, 이 영화에서는 절제된 화술과 건조한 화면, 고요한 감정적 파동으로 그것을 표현한다. 이처럼 쓸쓸한 영화가 또 있을까.


3. 바튼 아카데미

2023, 알렉산더 페인 / 코미디, 드라마 / 2시간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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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들뜬 마음을 안고 집으로 떠나간 크리스마스, 고등학교 바튼 아카데미에는 세 사람만이 남는다. 고집불통 역사 선생 '폴'과 문제아 '털리', 그리고 아들과 사별한 기숙사 주방장 '메리'. 이 세 사람은 텅 빈 학교에서, 혹은 학교 주변에서 크고 작은 일들을 겪으며 점차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서로의 상처에 대해서도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한다.


즐거운 크리스마스의 소동도, 떠들썩한 학교도 아닌, 크리스마스 기간에 썰렁한 학교에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라니. 이야기의 설정만 보면 다소 싱거워 보이지만,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굉장한 감정적 호소력을 발휘한다. 사실 우리 모두는 결코 이해받지도, 치유되지도 못할 내면의 상처를 하나쯤은 갖고 있지 않은가. <바튼 아카데미> 속 인물들은 크리스마스의 우울과 고독이라는 역설적인 상황 속에서, 서로의 상처를 진실한 태도로 위로한다.


<바튼 아카데미> 속 겨울은 위로의 계절이다. 겨울의 혹독한 날씨는 때로 서로를 보듬고 껴안아줄 수 있는 좋은 구실이 된다. 영화는 안정적인 연출력과 뛰어난 극작술로 인물 각각의 감정과 마음, 심리 상태를 효과적으로 묘사한다. 장소나 분위기가 자아내는 낭만적인 무드 대신, 섬세하게 연출된 대화 장면들과 작은 유머들로 인물들의 온기를 스크린 위에 구현한다. 일종의 노스탤지어마저 느껴지는 <바튼 아카데미>는, 겨울의 한복판에 서 있는 당신을 위로하기에 안성맞춤인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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