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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의 예술영화 : 걸어도 걸어도

번번이 미끄러지는 우리를 향한 연민

by 낙타

<걸어도 걸어도>

2008, 고레에다 히로카즈 / 가족드라마 / 1시간 54분


10여 년 전, 준페이의 가족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여름 바캉스를 떠난다. 그러나 준페이는 바다에 빠진 소년 요시오를 구하고 목숨을 잃는다. 그로부터 세월이 흘러 각자 가정을 꾸린 준페이의 동생들은 형의 기일에 맞춰 가족들과 고향집을 찾는다. 그리고 그 곳에는 잃어버린 아들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부모님이 있다. 모처럼 가족이 다 모인 자리, 여기에 준페이가 구해줬던 요시오도 찾아오고 가족들은 어딘가 불편한 기색을 숨긴 채 애써 밝은 척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출처 :왓챠피디아)


<걸어도 걸어도>는 단순하고 느리며 소박하다. 특별한 사건이라곤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부터, 그것을 담아내는 형식까지 그렇다. 카메라는 좀체 움직이지 않고, 누구 하나 격렬한 연기를 펼치지 않는다. <걸어도 걸어도>는 종종 잔잔하고도 섬뜩한 미동만을 일으킬 뿐 한 번도 요동치는 일 없이 끝까지 걸어간다.

그러나 영화가 끝난 후 <걸어도 걸어도>는 당신을 헤어 나올 수 없는 기억 속에서 몸부림치게 만들거나, 혹은 당신에게 담담하고도 강력한 위로를 선사하거나, 알 수 없는 쓸쓸함과 연민에 당신을 펑펑 울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종류가 무엇이든, <걸어도 걸어도>는 잔인하리만치 깊은 여운과 울림을 남긴다.

<걸어도 걸어도>는 탁월하고 섬세하다. 대사의 양과 질은 완벽하다. 무엇 하나 더하거나 뺄 것 없이 정교하게 아로새겨진 대사들은 태풍 같은 감정의 응축을 담기도 하고 인물들의 선명한 고통을 넌지시 암시하기도 한다. 대사를 활용하는 방식 또한 탁월한데, 인물들에 맞게 조립된 대사들은 거의 인물과 동화된 듯한 배우들의 완벽한 연기(누구 하나 부족한 연기를 펼치는 배우가 없다. 심지어 아역까지도 !)에 조응하여 해체되어 곱씹어질 여운을 남긴다. 인물들이 실없이 툭툭 던지는 대사들이 영화의 주제와 밀접하게 연관된 의미를 전달하기도 하고,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대사들은 종종 감정을 꾹꾹 억눌러 담은 말들이 서로에게 더욱 생채기를 낸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가장 가까이 있기에 가장 큰 아픔을 남기는 존재가 가족이다

완벽하게 조직된 대사들이 조화를 이루어 따뜻하면서도 섬뜩하고, 유머가 있으면서도 음울한 리듬을 창조해내는 영화의 대화 장면들은 때로는 인물에게 다가가고 때로는 인물로부터 물러남으로써 ‘가족’이라는 가장 근본적이고 내밀한 공동체를 해부한다. 그 작업은 대부분 고통스럽다. 왜냐하면 가족은 평온하고 따뜻하면서도 불편하고, 포근하면서도 가장 커다란 아픔을 안기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걸어도 걸어도>는 마치 미로와 같은 일본식 가정집의 좁은 창과 틈을 들여다보면서 일본 가정의 소통 방법을 고스란히 전달하고 그 사이에서 가족이라는 집단을 공들여서 묘사하고 정의한다.


그러나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가족 영화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결말에 이르러 끊임없이 반복되는 고통의 질서와 시간의 절망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영화에서 가족들을 모이게 한 것은 과거의 끔찍한 비극이다. 가족들은 그 아픔을 모른 체 하며 감내하는 중이다. 준페이의 어머니는 늘 과거를 후회한다. 그렇지만 어쩌겠나. 이미 시간은 지났다. 비극은 알 수 없을 때에 우리를 찾아오는 법이다.

고통의 질서는 여기서 발생한다. 스모 선수의 이름처럼 기억하고 싶은 것들은 정작 필요할 때에 기억나지 않고, 고통스러운 기억은 늘 먼저 찾아온다. 약속을 지키기도 전에 약속의 대상은 늘 먼저 떠나간다. 기약 없는 말들은 망령이 되고, 설명하지 못한 감정들은 늘 얼룩이 되어 남아 있다. 걸어도 걸어도 시간은 항상 우리를 지나쳐 가고, 우리는 번번이 미끄러진다.

늘 한 발짝씩 늦는게 우리네 인생인걸요

<걸어도 걸어도>는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리고 시간을 책망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영화는 시간을 견디며 걸어야 한다고 말한다. 죽은 토끼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을 비웃던 아이가 죽은 아빠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고통을 견디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기억과 시간이 고통스러워도 삶은 지속되니까.


한 가족을 향한 시선이 세상으로 향하는 마지막 쇼트에서, 넓이를 가늠할 수도 없는 그 연민은 마침내 세상을 뒤덮고 우리를 향한다. 별 수 있나, 온 세상이 이렇게 걷고 있는데.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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