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디에 서 계신가요
지긋지긋한 일과, 판에 박힌 일상, 늘 만나는 사람들, 피곤해도 지켜야 하는 규칙과 도덕. 우리 인생의 가장 큰 적은 어쩌면 반복과 연속, 예측 가능성에 의해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권태인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가끔 모든 짐을 훌훌 벗어 던지고 도피하거나, 제멋대로 방황하거나, 나를 괴롭게 하는 규칙들을 모조리 어기고 싶은 파괴적 충동이 내재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럴 수는 없기에, 우리는 비겁하게 대리만족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영화를 통해서. 막장인생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는 방법으로.
1969, 조지 로이 힐 / 서부극, 드라마, 범죄 / 1시간 50분
미국에 실제로 존재했던 파렴치한 은행털이 갱단 두목 '부치 캐시디'와 뛰어난 총잡이인 '선댄스 키드', 두 남자의 도피극. 두 남자는 서부를 가로지르며 강도짓과 약탈을 일삼고, 두 남자를 사살하기 위해 추적대가 뒤를 쫓는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게 끝. 이 영화엔 드라마의 엄청난 감동이나 혼을 빼놓는 스릴도, 복기할만한 주제의식도 없다. 그러나, 영화는 끝내주게 재미있다.
목적지, 혹은 이상을 잃은 채 끊임없이 방황하는 것. 그것 역시 우리네 인생의 한 단면 아닐까? 영화의 주인공들은 구제불능인 악당들이지만, 영화 속 서부는 이상한 낭만과 멜랑꼴리로 우리를 유혹한다. 당신도 모든 것을 내던지고 도망치고 싶지 않냐고 반문한다.
폴 뉴먼과 로버트 레드포드의 훌륭한 연기, 황량하고도 아름다운 서부의 풍경, 탁월한 음악과 씁쓸한 코미디. 그 모든 것들이 한데 어우러진 이 영화는 기존 서부극이 숭앙하던 가치인 영웅과 정의, 공동체의 윤리 따위를 깡그리 무시하고 정신없이 내달린다. 고전 서부극이라는 사실에 부담감은 전혀 느끼지 말고, 이 막장인생들의 말로를 영화로 직접 확인하시라.
2011, 스티브 맥퀸 / 드라마 / 1시간 41분
마구 날뛰는 막장인생도 있는가 하면, 스스로가 만든 구렁텅이 속에 가라앉아 끝없는 전락을 맛보는 막장인생도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 '브랜던'이 그 예. 섹스와 자위에 중독된 이 남자는 꿈도 희망도, 특정한 목표나 이상도 없는 공허하고 권태로운 삶 위에서 껍데기뿐인 삶을 살아간다. 그런 그의 앞에, 여동생 '씨씨'가 나타난다. 이제 그의 인생은 어떻게 변하게 될까?
속살을 갖고 싶은 껍데기, 맨살을 이루고 싶은 껍질, 부서지지 않고 흙이 되고 싶은 모래, 녹고 싶은 얼음의 영화. 이 영화는 삶의 권태와 무력감을 극복하는 방법을 찾지 못한 채, 욕망의 바다 속으로 투신하는 방법밖에 모르는 어떤 이를 보여준다. 사실 우리 역시 현실에서 미약한 희망조차도 찾지 못한 채, 어떤 대상에 지나치게 탐닉한 적이 한번쯤은 있지 않았던가.
영화 <셰임> 속 주인공의 막장인생은, 텅 비어버린 내면을 구원할 수 있는 뚜렷한 방도를 찾지 못한 위태로운 자아를 표상한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마이클 패스밴더의 가장 뛰어난 연기. 스티브 맥퀸의 묵직하고 차가운 연출. <셰임>을 보고 나면 '나는 무엇을, 왜 가장 욕망하고 있나?' 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될 것이다.
2019, 베니 사프디&조쉬 사프디 / 범죄, 드라마, 스릴러 / 2시간 15분
'언컷 젬스'. 직역하자면 '덜 깎인 보석'. <언컷 젬스>는 뉴욕 뒷골목에서 보석상을 운영하는 남자 '하워드'의 이야기다. 빚더미에 앉아있는 탓에 큰돈을 만지고 싶은 하워드는 자신이 겨우 얻게 된 미세공 보석 '블랙 오팔'을 이용해 한 탕 벌려 한다. 그런데 일은 점점 꼬여가고, 허황된 욕망에 사로잡힌 하워드는 한 차례의 도박에 모든 것을 건다.
줄거리만 보면 뒷골목 양아치의 희비극을 범죄영화와 코미디 장르의 클리셰 하에 버무린 것 같지만, 영화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아담 샌들러의 소위 '미친' 연기와 멀미가 날 정도로 생생한 촬영, 매 장면과 시퀀스마다 숨막히는 긴장감을 선사하는 편집과 연출은 한 남자의 막장인생을 폭발적인 에너지로 담아내는 동시에, 삶의 기묘한 역설을 묘사한다.
그 역설이란, 우리가 잔뜩 욕망하며 매달리는 대상이 실은 텅 비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설을 알면 뭐하겠는가. 우리는 또다시 욕망한다. <언컷 젬스>는 불같이 뜨거운 에너지를 가진 영화이지만, 그 이면에는 삶의 서늘한 진실이 숨어 있다. <언컷 젬스> 속 막장인생은 우리도 현재 겪고 있거나 언젠가 겪게 될지 모를, 욕망의 무한한 싸이클이다. '하워드'의 막장인생을 욕하면서도 응원하게 되는 이 기묘한 영화를 당신에게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