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1996, 진가신 / 드라마, 로맨스 / 1시간 58분
1986년 홍콩, 상해 출신의 소군과 이요의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된다. 대만 최고의 가수 등려군을 좋아하는 두 사람은 꿈을 위해 왔지만 낯설기만 한 홍콩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소군에게는 성공 후 결혼하기로 한 약혼녀가 있었고, 이요는 돈을 벌어 집을 사겠다는 야심이 있었다. 불안한 미래 속에 갈등하던 중 이요는 암흑가 보스와 연인 관계가 되고 그렇게 헤어진 뒤 1990년, 이요는 소군의 결혼식에서 3년 만에 재회하게 된다. 여전히 서로를 향한 사랑을 확인하지만 갑작스런 사고로 이요는 애인을 따라 떠나고 소군만 남게 되는데… (출처 : 왓챠피디아)
<첨밀밀>은 무언가 이상한 영화이다. 보통 멜로영화의 공식은 두 남녀가 저항할 수 없는 운명 때문에 영화의 3분의 2 지점에서 헤어지는 것이다. 두 남녀는 영화의 러닝타임 내내 사랑을 차곡차곡 쌓아오다가 클라이맥스, 절정 부분에서 가슴 아픈 이별을 맞이한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은 이별의 고통을 나름대로 감내하는 두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에 쓰인다. 그러나 <첨밀밀>에서 두 주인공은 정확히 영화의 절반 부분에서 헤어진다.
이유를 조금 더 파고들어 보자. <첨밀밀>에서의 이별은 예상하기 쉬운 지점에서 찾아오고, 그 이유도 지극히 타당하다. 소군과 이요는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홍콩에 찾아온 ‘이방인’이다. 홍콩은 곧 떠날 사람들의 도시이다(그래서 소군과 이요의 사랑은 왔다가 언젠가는 떠나야 하는 ‘모텔 방’으로 은유된다).
그뿐이던가. 소군에게는 고향에 두고 온 애틋한 약혼녀마저 존재한다. 그들의 이별은 예정된 일이며 현실적으로 언젠가는 마주해야 하는 사건인 것이다. 그런데 소군은 자신의 약혼녀 소정과 결혼하기 위해 고향으로 떠나지 않고 소정을 ‘홍콩으로’ 데려온다. 여기서 <첨밀밀>의 이야기는 거대한 파도 속으로 말려들기 시작한다.
이렇게 말해 볼까. <첨밀밀>은 상편과 하편으로 나누어진 영화다. 소군과 이요가 거리에서 이별하는 사건으로 상편과 하편은 나누어진다. 상편이 멜로드라마의 정석이라면, 하편은 격변하는 시대와 격동하는 세태가 만들어내는 운명의 굴곡 속에서 인물들이 몸부림치는, 오히려 시대극에 더 가까운 이야기다. 점수를 주라고 한다면 나는 상편에 10점을, 하편에 6점을 줄 것이다. 상편의 리듬은 매우 훌륭하고 따뜻한 정서와 포근한 유머가 가득 차 있다. 그러나 하편의 리듬은 뒤죽박죽이고, 인물들의 행동도 무언가 설명이 되지 않는 구석이 있으며 지나치게 신파적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첨밀밀>이 말하고 싶은 것은 대부분 하편에 담겨 있다.
아까도 말했듯 소군이 약혼녀를 ‘홍콩으로’ 데려오는 사건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들이 홍콩에 뿌리를 내리고 생활하기 시작할 때부터 신세계에 대한 환상은 걷히고 홍콩은 민낯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자본에 매몰된 세계에서 찾아오는 고립감이고, 일종의 신기루에 목도한 채 느끼는 허무함이며, 외로운 사람들과 혼란한 거리 사이에서 이방인이 느끼는 당혹감과 불안감이다(이요와 소군이 이별할 때 이요의 대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녀는 어디 가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토로한다.). 게다가 홍콩의 민낯은 홍콩의 종말이 가까워질수록 더 잘 드러난다. 소군과 이요의 사랑은 홍콩의 전성시대와 함께 찾아온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홍콩이 시대적 질서에 굴복하고 중국으로의 반환이 점점 가까워질 때에 이별한다.
홍콩 반환 이후의 홍콩 시민들의 표류 또한 <첨밀밀>은 묘사한다. <첨밀밀>의 하편에서는 각각의 인물들이 나름대로의 러브스토리를 마무리한다. 인물들은 어딘가로 떠나기도 한다. 영화 속의 대사처럼 ‘운명’은 거부할 수 없는 것일까. 소군과 이요를 이별하게 한 것은 세상의 변화다. 그들은 세상을 거역할 수 없다. 그래서 소군과 이요는(홍콩인들은) 머나먼 타국(미국)에서 희망찬 미래를 찾는다. 그러나 그들 앞에 놓인 것은 여전히 험난한 가시밭길이다.(이요의 구원자 파오는 미국인에게 총을 맞아 죽는다).
그럼에도 <첨밀밀>은 끝끝내 희망을 선택한다.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은 노래이고 추억인 것일까, 그들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가수 테레사 챙(등려군)의 노래 앞에서 멈춘다. 그 가수는 두 사람의 애틋한 사랑의 징표다. <첨밀밀>은 저항할 수 없는 비극적인 운명 속에서도 영원히 살아 숨 쉬는 추억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는 생생하게 시대를 그려내면서도 그 아픔 속에 따뜻한 멜로의 숨결을 불어 넣었다.
마지막 장면. 처음에서처럼 소군은 기차를 타고 어딘가로(홍콩으로) 도착한다. 이요도 함께다. 처음부터 함께였던 그들은 아쉽게 헤어진 후에 이제 다시 가는 것이다. 어디로? 등려군의 노래 ‘첨밀밀’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