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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실패를 위로하는 영화 세 편

혼돈과 무질서 앞에서 흔들리는 우리

by 낙타

실패. 우리의 삶을 가장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옭아매는 일. 인생사에 존재하는 모든 일들을 어찌 성공과 실패라는 이분법적 분류로 나눌 수 있겠냐마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실패했다는 감각 혹은 실패할 것이라는 두려움 아래 살아간다. 따지고 보자면 늘 계획대로 안 되는 우리네 인생에는 성공보다 실패가 더 빈번하지 않은가. 오늘 소개할 영화들은 그러한 우리의 마음을 다양한 방식으로 위무하는 영화들이다. 실패를 과감하게 딛고 일어나 성공으로 향하는 장밋빛 서사가 아니라, 실패를 온몸으로 수용하고 그 아픔을 성찰하는 영화들이다.


1. 밀리언 달러 베이비

2004, 클린트 이스트우드 / 드라마, 스포츠 / 2시간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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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지혈 전문가이자 복싱 트레이너 '프랭키(클린트 이스트우드 분)'와, 복싱에 대한 열정 말고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여자 '매기(힐러리 스웽크 분)'의 이야기. 모종의 이유로 딸과 관계가 소원해진 탓에 내면적으로 고통받던 프랭키는 매기를 처음에는 거부하지만, 매기의 집념과 열정에 차츰 마음을 열기 시작해 그녀를 복서로 키워가기 시작한다.


우리가 자주 봐왔던, 가난한 여성 복서의 성장기를 다룬 스포츠 드라마 아니냐고? 정확히 말하자면 3분의 1만 맞는 이야기다. 프랭키와 매기는 유사 부녀 관계로써 서로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하고 매기는 용맹한 복서로 성장해가지만, 그 후 매기에게 '어떤 사건'이 닥친다. 그리고 이 영화가 진짜 이야기하고 싶은 것들은 그 사건 이후에 비로소 펼쳐진다.


극복할 수도 없고, 해결할 수도 없는 실패 혹은 시련이 닥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실패가 예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달콤한 성공의 맛을 조금이라도 볼 수 있다면, 실컷 싸워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그것은 행복일까, 불행일까? 실패를 수용하는 일은 정말로 나약하고 비겁한 일인 걸까?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평면적인 스포츠드라마의 경계를 넘어, 삶과 실패를 깊이 응시한다. 두 주인공의 탁월한 연기와 감독을 겸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묵직한 연출력이 빛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가장 깊고 복잡한 걸작.


2. 도쿄 소나타

2008, 구로사와 기요시 / 드라마, 가족 / 1시간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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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관객들에게는 <큐어>로 익히 알려져 있는, 구요사와 기요시의 가족영화. 구로사와 기요시는 <도쿄 소나타>에서 아버지의 실직이 한 가정에 가져오는 혼란을 그리며 21세기 일본이 맞이한 곤경을 다룬다. 평화롭던 중산층 가족은 아버지가 실직하고, 엄마가 우울증에 걸리고, 형은 갑자기 미군에 지원하고, 막내가 몰래 피아노를 배우는 등의 사건들로 붕괴 직전에 몰리게 된다.


영화 속 인물들의 목적은 텅 비어 있다. 그들은 그저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남자로서, 장남으로서 역할을 수단화하며 삶을 영위해 나간다. 오직 가장 어린 주인공 켄지만이 순수한 희열과 열정, 재능을 발판 삼아 피아노를 배운다. 가장 어리고 미성숙한 인물이 자신의 정체성과 욕망을 가장 잘 인지하는 것이다. 영화 속 서사가 지닌 이러한 아이러니는 정체성 상실에 따른 현대 일본 사회의 본질적 문제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도쿄 소나타>에 등장하는 가족들에게 전염되어 있는 것은 실패의 감각이다. 내 삶은 무의미하며, 삶 전체에서 이룬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공허와 허무의 감각. 이 감각이 상실된 정체성의 빈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 구성원들이 그러한 감각을 공유하는 일은 비단 21세기 일본에만 해당되는 현상은 아니다. 영화는 그것을 극복하거나 부정하는 대신, 우리들을 향해 아주 짧고 강력한 위로를 제시한다. 영화에서 확인해 보시길 권한다.


3. 드라이브 마이 카

2021, 하마구치 류스케 / 드라마 / 2시간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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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죽음 2년 후, 연극을 연출하게 된 연극 배우이자 연출가 '가후쿠'가 운전사 '미사키'를 만나게 되며 벌어지는 이야기. 겉으로 내색하진 않지만, 치유하기 어려운 내면의 상처를 입은 가후쿠는 연극 <바냐 아저씨>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사건들을 겪으며 조금씩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을 응시하기 시작한다.


간단한 스토리만 보면 예술을 매개로 한 힐링 드라마의 전형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그리 간단치 않다. 영화 속 연극 제작은 아무 감정 없이 대사를 그저 기계적으로 읊는것으로부터 시작해, 다양한 언어와 우연의 충돌을 차츰 연극 안으로 흡수하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이는 하마구치 류스케 자신이 영화를 연출할 때 연기 접근법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다(하마구치 류스케는 무감정에서 시작해, 차츰 감정을 고양시키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한 우연을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대본 리딩을 진행한다고 알려져 있다).


즉 하마구치 류스케는 <드라이브 마이 카>의 플롯에도 세상의 혼돈과 삶의 무질서를 그대로 수용하는 자신의 의 영화 제작론을 고스란히 접목시킨다. 여기서 발생하는 신비로운 감동은 영화의 두 주인공인 가후쿠와 미사키의 서사를 움직여, 두 사람이 서로를 위무하도록 만든다. 우리의 실패는 주로 우리의 책임을 벗어난 혼돈과 무질서로부터 비롯되지만, 때때로 그 사실을 망각하는 우리는 스스로를 자책한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불완전함을 껴안고, 때로 혼돈 앞에서 흔들릴 필요가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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