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과 밖에 관한 영화
2024, 브래디 코베 / 드라마 / 3시간 35분
전쟁의 상흔을 뒤로하고 미국에 정착한 건축가 ‘라즐로 토스’(애드리언 브로디). 미국 이민자의 냉혹한 현실 속에 전쟁의 트라우마를 견뎌내던 어느 날. ‘라즐로’의 천재성을 알아본 부유한 사업가 ‘해리슨’(가이 피어스)이 기념비적인 건축물 설계를 제안한다. 하지만, 시대와 공간, 빛의 경계를 넘어 대담하고 혁신적인 그의 건축 설계는 사람들의 공감을 얻지 못하고 반대에 부딪히게 된다. 후원자 해리슨의 감시와 압박, 주변의 비난이 거세질수록 오히려 더 자신의 설계에 집착하던 ‘라즐로’. 혁신적인 브루탈리즘 건축에 자신을 투영하던 ‘라즐로’는 결국 공사가 중단될 위기에 처하는데... (출처 :왓챠피디아)
영화의 시작. 이민자 호송선 지하의 혼란스러운 어둠을 겨우 뚫고 갑판으로 올라온 라즐로는 탁 트인 하늘과 그 하늘 아래 위태롭게 걸려 있는 자유의 여신상을 보고 환한 미소를 짓는다. 외화면에서는 유럽에 두고 온 아내의 음성이 내레이션으로 들려오고, 내화면에서는 불투명한 미래를 향해 한 발짝 나아가는 라즐로의 모습이 등장한다.
그러니까 <브루탈리스트>의 핵심은 이 시작에 모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지하와 지상, 어둠과 빛, 과거(아내)와 미래(미국), 안과 밖. 영화의 러닝타임 내내 삶의 모순과 서로 다른 세계 사이의 경계선 위에서 분투하게 될 라즐로의 운명은 이미 영화의 시작부터 탁월하게 암시되어 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건축은 멀쩡히 존재하는 허공을 도려내어 안과 밖을 구분짓는 예술이자 작업이 아니던가. 조금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브루탈리스트>는 안(과거=유대인=아내=어둠)과 바깥(미래=예술가=미국=빛)에 관한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외부에 존재하는 빛을 내부로 어떻게 투사할 것인가. 이것은 건축의 핵심적 과제이자, 영화 속에서 뷰런 센터를 설계할 때 라즐로가 가장 골몰했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라즐로로 하여금 고난을 겪게 하는 건 안쪽과 바깥쪽 모두다. 과거의 역경을 딛고 미국으로 건너온 라즐로의 아내는 신체적 고통과 정신적 결핍을 지닌 인물로서, 라즐로의 미래를 의도치 않게 속박한다. 그녀는 라즐로와의 황홀한 섹스가 끝나자 목적을 달성했다는 듯 뷰런에게 직접 찾아가 뷰런의 강간 사실을 폭로함으로써 프로젝트를 중단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더군다나 헝가리 출신 유대인이라는 라즐로의 정체성은 그의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을 끊임없이 침범한다.
바깥쪽 역시 라즐로를 괴롭게 한다. 찬란한 빛과 벅찬 미래, 예술가의 이상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자유의 영토처럼 보였던 미국은 차별과 냉대, 자본과 계급의 압력으로 라즐로를 빈사 상태로 몰고 간다. 사실 라즐로가 맨 처음 보았던 미국의 하늘은 거꾸로 뒤집혀 있었다. 진취적인 이상과 드높은 도덕성을 지닌 모범적 자본가처럼 보였던 뷰런(=미국)은 라즐로를 겁탈함으로써 내면의 악마성을 적나라하게 표출하고 만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완전한 안쪽은 존재하지 않으며, 완전한 바깥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안쪽에는 내밀함이, 바깥쪽에는 희망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온전한 빛, 온전한 어둠 역시 없다. 파시스트에 대항하는 성전(聖戰)에 사용되었던 아름다운 대리석 산 안에서는 향락적인 파티가 열리고, 마약이 하반신 불구자를 걷게 하는가 하면, 십자가의 빛은 그 누구도 구원하지 못한다.
이렇듯 모순이라는 테마는 <브루탈리스트>의 서사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고리다. 그러나 감독 브래디 코베는 단순히 서사의 모순적 장치를 통해 이야기의 충격을 극대화하는 것을 넘어, 조금 더 커다란 야심을 실현한다. 그 야심은 바로 전통적인 디아스포라 이민자 이야기와 전통적인 예술가 이야기, 둘 중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새로운 이야기를 담대한 방식으로 구축해내는 것이다. 여기에는 감독 자신조차 이민자이자 예술가인 라즐로 토스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솔직한 인정이 있다. 그리고 그 바탕 위에서 서사의 층위를 다른 차원으로 확장시키려는 집요한 노력이 있다.
라즐로를 포함한 이 영화의 유대인들은 ‘꿈의 땅’ 미국에 정착하지 못하고 내면의 상흔을 지닌 채 고향으로 쓸쓸히 귀환한다. 따라서 이 영화는 전통적인 이민자의 역경 극복 서사가 아니다. 그리고 라즐로가 그토록 완성하길 갈망했던 프로젝트는 결국 미완의 형태로 남는다. 따라서 이 영화는 필생의 작품을 완성한 후 성공을 이룩하거나 전락을 경험하는, 전통적인 예술가 서사도 아니다.
<브루탈리스트>는 그 두 종류의 이야기 사이, 지독한 모순과 경계 위 어딘가에 서 있다. 라즐로가 남긴 브루탈리즘 건축물 역시 마찬가지. 안과 바깥, 빛과 어둠, 과거와 미래 사이의 압력에 짓눌려 겨우 탄생한 이 결과물을 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장황한 미사여구와 거창한 해석으로 덧없는 의미를 덕지덕지 붙이는 것 뿐이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이민자의 상처가 치유될리 없고, 예술가의 결함 혹은 선택을 복원할 수 있을리도 만무하다. 그는 스스로 고통을 선택한 순교자인가, 실패한 야심가인가. 이 질문 역시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덩그러니 남는다.
그렇게 <브루탈리스트>는 결말에 이르러 고통스럽게 고백한다. 예술은 삶을 구원할 수 없고, 삶은 예술을 구원할 수 없다고. 모순은 해결이 불가능한 채로 그저 존재하며 우리가 서 있는 현실(혹은 미국의 현재)는 그 모순들의 결합체이자 역사라고. 앞으로 뻗어 있는 도로를 경쾌하게 질주하며 제목을 선보였던 이 영화는, 눈물 흘리는 소녀의 얼굴로 끝을 맺는다. 이는 영화의 맨 첫 장면이 아니었던가. 결국 앞으로 가는줄만 알았던 우리는 3시간 30분을 지나 제자리로 돌아온 셈이다. 그러나 아무리 괴로운 여행이라도 남는 것은 있는 법.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타협하지 않는 이 걸작이 남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이제는 우리가 골똘히 생각해볼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