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트라우마에 노크하는 영화들
트라우마(Trauma). 정신적 혹은 신체적 외상이 남긴 흉터. 우리 모두는 크든 작든 제각각의 트라우마를 가슴속에 품고 살아가며, 때로 그 트라우마는 우리의 사고와 행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이번에 소개할 영화들은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극복하는 방법을 쉽게 제시하기보단, 그 상처를 헤집고 상처의 끝에 도달함으로써 우리에게 기묘한 위안을 안기는 영화들이다. 상처를 똑바로 응시하는 것을 넘어, 상처의 바다 속에서 헤엄치는 과정을 통해 오히려 상처 속에서 호흡하는 법을 넌지시 제시하는 영화들이다.
1999, 폴 토마스 앤더슨 / 드라마 / 3시간 8분
3시간을 넘는 러닝타임. 무려 7명의 주요 인물들. 폴 토마스 앤더슨은 제각기 다른 사연을 가진 캐릭터들 제각각의 플롯을 하나의 영화 속에 욱여 넣으면서도, 한시도 영화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괴물같은 연출력을 과시한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각기 다른 이야기들을 하나의 리듬으로 배열하는 데 성공한다.
이 영화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치명적인 트라우마 혹은 상처에 시달리는 인물들이다. 떠나버린 아버지에 대한 증오에 시달리는 남자, 죽기 직전에야 거대한 후회에 맞닥뜨린 남자, 아버지로부터 강간당한 트라우마로 인해 마약 중독으로 살고 있는 여자, 남편의 추악한 진실을 알게 된 아내, 그리고 그저 사랑이 하고 싶은 남자. <매그놀리아>의 캐릭터들은 올바르게 정리하지 못한 과거, 혹은 외면하고 싶은 추악한 진실로부터 고통받고 괴로워한다.
자, 그렇다면 이 모든 상처들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 것일까? 과연 이 모든 인물들은 상처를 딛고 기적처럼 일어날 수 있을까? 폴 토마스 앤더슨은 영화의 결말에 이르러 정말 우리가 예상치도 못한,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인물들을 위로한다. 영화가 선사하는 마법이 궁금하다면, 직접 확인해 보시길 권한다.
2017, 자비에르 르그랑 / 드라마, 스릴러 / 1시간 33분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를 2주에 한 번씩 만나야 하는 11살 소년 줄리앙의 이야기. 보잘 것 없는 힘으로 엄마를 지키려 하는 나약한 소년의 필사적인 사투. 가정폭력은 그 폭력의 심각성이 외부 세계에 노출되기 쉽지 않다는 점과, 가족이라는 질긴 인연의 특수성이 그 폭력의 완전한 단절을 어렵게 한다는 점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지옥에 가깝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가정폭력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거시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기보단, 그 두려움과 공포를 직접 경험해야 하는 연약한 소년의 입장에 선다. 특정한 해결법을 제시하기보단, 일단 관객으로 하여금 그 숨막히는 긴장을 직접 체감하도록 한다.
거창한 손짓 발짓이 아니라 나직한 발걸음으로 호흡을 장악하는 이 영화는, 도무지 빠져나오기 힘든 가정폭력의 비극을 그 어떤 영화보다도 호소력 짙게 묘사해낸다. 유사한 트라우마를 지닌 사람들이라면, 영화를 관람하며 격렬한 고통을 느낄지도 모른다. 혹은 소년의 등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이 영화가 온 힘을 다해 당신의 아픔을 함께 느끼려 한다는 사실이다.
2019, 아리 애스터 / 드라마, 공포, 미스터리, 스릴러 / 2시간 27분
일가족이 모두 사망하는 비극적인 사건 후, 여대생 대니는 남자친구 크리스찬을 따라 스웨덴 마을의 미드소마 축제에 참가하게 된다. 이 영화에서 다루는 트라우마는 가족의 사망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미드소마>는 연인 간의 이별 트라우마 역시 핵심적으로 다루고 있다. 주인공 대니는 비극의 고통을 그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며, 가장 가까운 사람인 남자친구 크리스찬마저 그 고통을 외면하기 때문이다.
<미드소마>의 공포스럽고 기괴한 축제는 장르적으로 오컬트 혹은 포크 호러의 자장 안에 있지만, 서사적으로 보면 대니가 그 자신의 고통과 고독을 온전하게 이해받고 치유받는 과정이다. <미드소마>가 독창적이고 흥미로워 보이는 건 이 독특한 역설 때문이다. 사실 우리 모두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도무지 치유되지 않는 트라우마 혹은 상처를 하나씩은 갖고 있지 않은가.
아리 애스터가 그 스스로 이별의 고통을 떠올리며 구상했다고 밝힌 <미드소마>는, 이별을 극복하는 가장 그로테스크한 방식을 선보인다. 정말로 극심한 실연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사랑 영화보다는 오히려 <미드소마>가 관람하기에 적합할지도 모른다. 당신은 이 영화를 보며 소름돋는 공포를 느끼다가도, 어느 순간 기묘한 위안을 받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