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아름다운 믿음을 가진 영화
1967, 자크 타티 / 코미디 / 2시간 6분
파리에 온 비즈니스맨인 '윌로 씨'는 낯설고 무표정한 고층건물과 애매한 공간 때문에 어리둥절하면서 때마침 미국인 단체 관광단과 여기저기서 부딪힌다. 그러던 중 그는 새로 개업한 '로얄 가든' 레스트랑에서 만난 관광객 바바라라는 여성과 친해진다. 뭔가 어색했던 저녁 시간은 윌로의 유쾌한 행동으로 즐거움과 로맨틱한 파티 무드가 밤늦게 계속되는데... (출처 :네이버 영화)
60년대 말, 유럽 영화는 전환점을 맞고 있었다. 전후의 영화세계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고 탁월한 미학적 성취를 거둔, 이른바 ‘리얼리즘’ 영화들이 새로운 시험대에 올라 있었던 것이다. 유럽은 점차 전쟁으로부터의 재건이라는 과제에서 해방되고 있었고, 미학적 급진성을 지닌 채로 전후에 태동했던 리얼리즘 양식(프랑스의 시적 사실주의,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 등)은 새로운 딜레마를 마주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이 그들의 방법론을 고수할 경우 사실적이지 ‘않은’, 낡은 사실주의와 맞닥뜨리게 된다는 것이었다.
사회적 문제와 거리에 스며든 일상의 고통, 무산 계급의 고투를 다루었던 일련의 사실주의는 더 이상 관객과 평단의 주의를 환기시키지 못하게 되었으며, 진실의 재현에 대한 엄격하고 치열한 태도는 점차 설득력을 잃어 갔다. 새로이 나타난 작가주의의 이념은 단순히 리얼리즘을 넘어 영화라는 매체가 지닌 근본적인 속성과 예술에서의 위치에 관해 강력하게 질문하기 시작했고, 전후에 구축된 세계의 새로운 질서-냉전, 보이지 않는 긴장-는 고정된 진실의 존재 가능성을 희미하게 지워 갔다.
자크 타티의 <플레이타임>은 이러한 경향의 한가운데 서서 그 모든 상황들에 대해 익살맞게 웃는다. 영화는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지는데, 답답한 주인공 윌로 씨가 회색빛 도시의 커다란 빌딩에서 길을 잃는 가련한 전반부와, 번지르르한 고급 레스토랑이 난장판이 되어 가는 후반부다. 전반부와 후반부의 방식은 다르지만 자크 타티는 영화 내내 리얼리즘의 몰락을 풍자하고 현대인을 조소한다.
참신한 디자인과 완벽한 구성미의 세트를 감상하는 재미가 있는 전반부는 영화가 다룰 수 있는 사실주의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 준다. 자크 타티는 도시화의 풍경과 현대인의 소통의 부재, 삭막해진 삶을 그려내기 위해 꼭 사실주의적인 양식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플레이타임>의 전반부에서 자크 타티는 리얼리즘 형식과는 정반대로 가기 시작한다. 그는 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도시를 지어올리고, 기발하면서도 뜬금없는 음향 효과를 삽입하고, 비상식적인 에피소드를 나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레이타임>은 어떤 측면에선 그 어떤 사실주의 영화보다도 서늘한 기시감을 안겨 준다. 자크 타티는 이 영화에서 인공적인 요소 속에 감추어진 실제적 풍경이라는 새로운 미학을 대담하게 펼쳐 보인다. <플레이타임>의 전반부에서 대부분의 웃음 포인트는 어처구니없는 상황과 풍경이 유발시키는 실소에 가깝지만 그 웃음 이면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자크 타티는 구도와 배치가 정교하게 설계된 미쟝센을 통해 현대인의 불안과 소통 장애 그리고 과도한 물질주의를 예리하게 풍자하며, 현실의 과장 혹은 현실의 우스꽝스러운 변형을 통해 세상의 본질을 그려내는 역설적인 방법론을 구현한다.
<플레이타임>의 전반부가 압도적인 미쟝센과 구도의 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면, 대부분이 실내에서 벌어지는 영화의 후반부는 통념을 거스르는 참신한 디테일과 독특한 미술을 주요 동력으로 삼고 있다. <플레이타임>의 후반부는 화려하고 빈틈없는 공간으로 설계된 고급 레스토랑이 예기치 못한 과정에 의해 난장판이 되는 과정을 담는다. 전반부의 주제의식을 고스란히 실내로 옮겨 계급에 대한 담론으로까지 확장시키는 것을 예상할 수도 있겠으나, 자크 타티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대신에 자크 타티는 모더니즘 영화들이 당면한 문제와 영화 매체 안으로 새롭게 불어오던 신선한 바람을 실내 코미디 양식으로 담아낸다. 식당이 파괴되는 과정을 한 번 보자. 부서진 천장은 마치 기하학적 양식의 장식물처럼 묘사된다. 길쭉한 의자는 원통이 된다. 기둥의 무늬는 지도가 되고, 유리문은 깨졌지만 사람들은 문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곳으로 드나든다. 고급스러워 보이던 의자는 분리되고, 깨진 유리는 얼음이 되며, 화려한 디자인은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이 되어 버린다. 사물은 본래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사람들의 격식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자크 타티는 구조물을 파괴하는 과정을 통해 현대인의 물질주의를 조롱하지만,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가 영화와 예술이 마주한 변화 역시 생생하게 그려낸다. <플레이타임>의 후반부는 세상의 경직된 질서에서 해방되는 카타르시스와 그것이 주는 순수하고 역설적인 웃음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이것은 60년대 말을 통과하는 자크 타티의 심리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으레 뛰어난 예술 작품들은 예술의 가치와 삶의 풍경을 동시에 성찰한다. <플레이타임>은 명백히 이 범주에 속해 있다. 자크 타티는 영화 안에서 영화의 위치와 본질을 응시하고 숙고하며 동시에 인간의 삶을 과감한 창의력과 상상력으로 그려낸다. 그러나 내가 그 중에서도 <플레이타임>이 조금 더 특별하고 위대한 걸작이라고 느낀 것은 영화의 마지막 10분 때문이다. 파티가 끝난 후, 주인공 윌로 씨는 버스에 탄 여자에게 선물을 건넨다. 그 선물은 꽃이다. 여자는 꽃을 보고는 창밖의 가로등으로 시선을 돌린다.
길가에 수없이 늘어서 있는 것들은 거대한 꽃일까, 가로등일까? 자크 타티는 새로이 불어오는 거대한 바람(사실주의의 퇴락)에 몸을 맡기면서, 동시에 우리가 이것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고 속삭인다. 그 속삭임은 더없이 친근하다. 자크 타티는 상상력에의 굳건한 믿음으로 우리를 이끈다. 이 낭만주의자는 영화 속 짓궂은 상상과 얄궂은 코미디가 우리의 진짜 모습을 투영할 수 있다고 믿음과 동시에, 물질주의가 팽배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앞에도 새로운 낭만이 펼쳐질 것이라고 낙관한다. 내가 아는 한 <플레이타임>은 가장 아름다운 믿음을 가진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