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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파랑 Aug 10. 2023

《왼손에게》 한지원 사계절

왼손이 될 오른손, 오른손이 될 왼손

왼손이 될 오른손오른손이 될 왼손

왼손에게》 한지원 사계절


그림책 《왼손에게》는 앞표지 그림이 퍽 인상적이다. 오른손과 왼손이 서로 연필을 들고 그림을 그리고 있다. 오른손은 왼손이 그려주었을 것 같은 어설픈 연필을 들고 있고, 왼손은 오른손이 그려주었을 것 같은 잘 그려진 연필을 들고 그림을 그리고 있다. 특이한 것은 그림이 묘하게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선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이다.    

       

《왼손에게》는 깔끔하고 단순한 선으로 그림들을 완성하고 색깔 사용이 매우 제한적이다. 그림들이 대단한 기법이나 화려함을 지니고 있지 않아 소박하지만, 시원시원한 느낌을 주고 여러 번 들여다보게 하는 매력을 지녔다. 무기교의 기교가 느껴진다고나 할까?         

 

그림책에는 면지가 있다. 그림책 앞뒤 표지를 넘기면 나오는 공간으로 그림책의 앞표지 뒤에 두 페이지, 뒤표지 앞에 두 페이지가 면지다. 면지의 형태는 그림책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하다. 그림책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단색으로 면지를 넣거나, 작은 그림을 반복적으로 그려 넣기도 한다. 앞 면지부터 이야기가 시작되고 뒤 면지에서 이야기가 끝나는 경우도 있고, 그림책 내용이 전개되면서 앞 면지와는 달라진 상황을 뒤 면지에 표현하기도 한다. 어떤 그림책들은 면지가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기도 해서 그림책을 읽을 때 면지도 꼼꼼하게 읽어야 한다.          


《왼손에게》의 면지는 흰색 바탕으로 아무런 그림이 없다. 그냥 독자의 시선이 가장 많이 갈 것 같은 위치(오른쪽 페이지 왼쪽 아랫부분)에 “정말 참을 만큼 참았어.”라는 문장만 있다. 싸우기 전에 할법한 말을 툭 던지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정말 참을 만큼 참았어.”라는 말은 왼손에게 불만이 많았던 오른손이 한 말이다. 능숙하다는 이유로 온갖 궂은일은 혼자 다 하는 오른손은 늘 억울하다. 아무리 봐도 왼손도 자신과 똑같은데, 오른손과 다르게 왼손은 힘든 일은 하지 않고 근사하고 우아한 삶을 살고 있다. 오른손은 왼손이 얄밉다. 결국 오른손과 왼손의 갈등은 커지고 둘은 싸우고 만다. 


오른손의 삶은 피곤하다. 기대에 찬 주의의 시선. 오른손으로서 감내해야 하는 책임. 세련되고 노련한 모습 뒤에 감추어진 외로움. 오른손은 그동안 이 모든 것을 감내해야만 했다. 왼손도 할 말이 많다. 자기가 무엇을 해보려 하면 서툴다며 핀잔을 주고, 오른손이 잽싸게 해 버리니 연습을 통 못해 능숙해지지 못한 것이 억울하다. 왼손도 사실 끊임없이 노력하고 배우고 있다. 오른손처럼 다재다능한 왼손이 되기 위해 열심히 도전하고 있다. 단지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능력과 성격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은 쉽지 않다. 가정 내에서도 그렇지만 학교나 직장, 다양한 사회생활에서 우리는 여러 사람들과 공존한다. 한 공간에서 생활하지만 서로가 맡은 역할이 다르고 느끼는 책임감이 다르다. 같은 구성원이지만 서로가 잘하는 것이 다르고, 공통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시간의 양도, 능력도 다르다.     


표지의 그림을 다시 살펴보자. 표지에는 오른손이 왼손을 그리고 있고, 그 왼손은 다시 오른손을 그리고 있다. 왼손을 그리고 있는 오른손은 동시에 왼손에 의해 그려지고 있다. 표지의 그림은 오른손과 왼손의 역할이 순환되는 구조라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의 삶은 오른손과 왼손이 순환 반복된다.      


인간은 모두 왼손으로 태어난다. 미약한 인간은 가정과 학교, 직장과 사회에서 수많은 오른손의 보살핌을 받으며 오른손으로 점차 성장해 간다. 성인이 된 오른손은 가정을 꾸리고 부모가 되어 왼손인 자녀들을 돌보지만 시간이 흐르면 다시 자녀들의 돌봄을 받아야 하는 나약한 노인이 된다. 인간은 결국 왼손으로 태어나 오른손으로 살다가 다시 왼손이 되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직장에서도 이와 비슷하다. 다양한 업무에 만능이 아닌가 싶을 정도의 능력을 발휘하는 고경력자들도 모두 신입 시절을 겪었다. 미숙하고, 느리고, 서툰 시간을 지나 지금의 능력자가 된 것이다. 실수하면서, 배우면서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오른손으로 성장했을 것이다.  


우리 집 남편은 집으로 귀가하면 주로 왼손의 모습으로 존재한다. 맞벌이를 하며 육아를 하거나 집안일을 할 때 왼손의 모습을 한 남편이 항상 얄미웠다. 퇴근하고 돌아와 쉬지도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며 식구들이 먹을 음식을 준비하고 집안일을 하며 화가 나기도 했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 나는 이런 생각을 덜하게 되었다. 그 해에 나는 크게 아팠다. 질병을 겪고 회복을 하기 전까지 나는 왼손으로 살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 우리 집에서 오른손으로 산 것은 평소에 그렇게 어설퍼 보였던 나의 남편이었고, 어리게만 생각했던 초등학생이었던 두 딸들이었다. 오른손이었던 내가 왼손으로 변하자 우리 집에서 항상 왼손으로 존재했던 남편과 딸들이 조금 더 의젓한 모습으로 나의 빈자리를 채워갔다. 건강을 되찾고 지금은 가정 내에서 다시 오른손으로 살고 있지만, 나는 내가 순식간에 왼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 내가 더 나이 들면 나도 왼손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사회적 역할이나 장면에 따라 오른손이 되기도 하고 왼손이 되기도 한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오른손인 사람은 없다. 단지 표지의 그림처럼 우리의 역할은 다양한 장면에서 순환되는 것이다. 오른손으로 살면서 지칠 때, 돌고 돌아 내가 왼손이 되는 순간 내 주변에 있는 왼손이 오른손이 되어 나를 돌봐줄 거란 사실을 기억한다면 마음이 좀 더 여유로워진다.


답답하더라도 오른손이 왼손을 조금 더 기다려 주었더라면. 서툴더라도 왼손을 타박하지 않고 격려해 주었더라면. 왼손이 지금보다 더 나은 존재로 성장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오른손이 왼손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집안일에 서툰 남편과 아직은 어려 보였던 딸들과 집안일을 나누지 못했던 나처럼. 우리가 왼손의 성장을 가로막으며 오른손이라 외롭고 힘들다고 불평만 늘어놓고 있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영원히 오른손으로 존재할 수 없다. 한평생을 오른손으로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이라면 어느 자리에서는 오른손으로 어느 자리에서는 왼손으로 사는 것이 당연하다. 아무리 다재다능한 사람이라도 못 하는 것은 분명히 있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사람들이 주위에 있기 마련이다. 인간은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왼손의 모습으로 변해갈 수밖에 없다. 나이 듦이란 왼손이 된다는 것이다. 순리대로 살아야 하므로, 앞으로 왼손이 될 것이므로 왼손에게 너그러워야겠다. 인간이 왼손으로 태어나, 왼손으로 죽어간다는 것은 우리의 오만함을 막기 위한 신의 한 수다.       


《왼손에게》는 관계와 연대에 관한 책이다. 우리가 주변인과 더불어 살면서 오른손으로 사는 순간에 교만하게 굴진 않았는지 되돌아보게 한다. 오른손의 그늘에서 성장하지 못하는 왼손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기다려 주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 부족한 왼손과 화가 난 오른손이 힘을 합쳐 모기를 물리치는 장면에서는 부족함이 많은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야 할 이유를 알게 된다. 모자람이 있어도 함께 연대한다면 무엇이든 헤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른손의 피곤함과 외로움을 살필 수 있는 눈과 왼손을 기다려 줄 수 있는 여유로운 마음을 갖고 싶다.     



 ☆ 그림책 《왼손에게》의 표지 그림과 묘하게 닮은 그림

<그리는 손> 에셔(M. C. Escher) 석판화 28×33㎝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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