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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를 세 명이나 쓰게 되다니

비록 나를 악마로 부르지만...

by 햇살나무

올해 초,

임신 사실을 알고 출산준비를 하다가

베트남에는 산후조리원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첫애 때는 산후조리원을 나와서도

친정에서, 시댁에서 또다시 친정에서

100일까지 조리를 하고 내 집으로 갔는데.


여기서는 출산한 지 4일 만에

갓난 아가를 데리고 집으로 와야 했다.


'둘째는 한국에서 낳을까?'


결론은 "안된다"였다.


큰애 학교 때문이라는 핑계로...


사실 나는

비행기 타고 혼자 둘째를 안고 다녀오는 게 자신이 없었다...




베트남 커뮤니티에다 물어보니, 이곳은

"내니"문화가 잘 되어있었다.

베이비시터를 부르는 베트남어 같다.


내니..


집안 청소와 요리를 하는 이모는 "메이드"

아이를 돌봐주는 이모는 "내니"

나이 많은 언니는 "쯔어이"

나이 적은 동생은 "엠 어이"


각각의 명칭이 생소하고 다양하지만,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젖어든 단어들.

이제는 편하게 사용하고 있다.


한국인들이 많이 들어오고 있는 추세여서,

내니나 메이드를 구하는 건 지금 하늘의 별따기가 되었다.


한국인 집에서 일해본 경력이 있는 이모들을

한국인들은 선호한다.

말은 안 통하지만

눈짓 , 손짓, 발짓으로 얘기해도 다 이해하는 이모는

한국인 집에서 일을 해본 사람일수록 다르단다.


한국인들의 소개를 기다리기만 해야 하는 상황.


그런데 내게 그 소개가 돌아올 확률은

너무 희박했다.




하루는 임신으로 퉁퉁부은 발과 다리 마사지를 받기 위해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네일숍을 찾았더랬다.


부른 배를 보고 임신임을 알아차린 네일숍의 사장님.

사장님도 얼마 전 셋째를 이곳 , 베트남에서 낳았다고 한다.

이런저런 이야기와 생활의 지혜가 콸콸콸 쏟아졌다.

사장님의 이야기 중 가장 귀가 솔깃했던 것은 '이모 구하기'였다.

내게 당장에 제일 급했던 이야기였으니.


한국인들에게서 소개를 기다리지 않고

직접 페이스북에서 구하는 한국인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장님께 그 노하우를 전수받고,

나는 당장 실행에 나섰다.


우리 집에서 몇 달 살림을 배우며

주 3회, 하루 2시간 일을 하다가

산달 10월부터 24시간을 우리 집에 머물며

아이를 봐줄 수 있는 분으로 구했더니,


모두 연락이 와서는

하나같이 하는 말이

'지금 당장 하루 10시간의 일을 원한다'거나,

'주 3회 하루 2시간은 가능하지만 아이 돌보는 일은

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내가 너무 애매모호하게 구한 것일까..


말도 안 통하는 이모들과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을 때까지

석 달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대략

50명의 베트남 이모들과 interview를 했다.


매일이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어느 날 나는 새로운 작전을 짰다.

청소해주는 메이드 이모와

신생아를 봐주는 메이드 이모를 따로 구하기로 했다. 그랬더니,

사람을 뽑는 일이 쉬워졌다.


할 수 있다고 해놓고

오랜 시간, 더 많은 금액을 요구하며 나의 애간장을 태우던 이모들은 달라졌다.

약삭빠르고, 돈만 밝힌다는 생각에 처음에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기간도 아직 남았고, 일 시작도 하기 전에

돈부터 먼저 따지고 드는

베트남 이모들의 계산적인 행태에

혀를 끌끌 차기 일쑤였다.


지쳐서 다 포기하고 싶을 때쯤 한 이모가 연락이 왔다.


'아직도 구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래, 너 잘 걸렸다. 어디 맛 좀 봐라'


나는 그동안 쌓였던 베트남 이모들의 나쁜 행태를 따발총처럼 쏘아댔다. 그랬더니 이 이모는 침착하게 대응했다.


'그건 니 하기 나름이다. 네가 무슨 일을 언제 어떻게 하는지 정확하게 정해서 금액도 자신 있게 이야기를 하면 적당한 선에서 합의가 이뤄지고 이모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그래서 그 이모와 그 자리에서 대화를 끝내고 적당한 금액으로 노사합의를 체결했다.

지금도 일을 하고 있지만, 참 좋은 분이다.

손도 빠르고, 게다가 영어까지 잘하는데

친절하기까지 하시다.




이번에는 신생아를 돌보아줄수 있는 이모를 구했다.

그들은 똑같은 방식으로 나의 애간장을 녹였다.

화가 났다 가라앉혔다,울그락푸르락

내 머리카락이 다 뽑힐 것처럼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서 폭발할 지경에 이모가 뽑혔다.


우리 집에서 머물면서 함께 생활할 신생아를 돌보아줄 이모였다.

이제 끝~~

하는 순간,

갑자기 퇴짜를 놓는다. ㅡㅡ

또 다른 어느 집에서 더 높은 가격을 부른 것이려니...


나는 10월부터 일을 하기로 했지만,

그녀는 당장 8월에 시작하면서

더 많은 금액으로 같은 일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잘 가라~'속으로 빠빠이를 부르는 순간,




군인복장을 하고 찍은 증명사진을 내게 던지는

한 이모와 만나게 되었다.

자신의 신분증, 백신증명서, 내니 경력을 보이는 사진 등등을 내게 페북 메신저로 말이다.



늘 파파고 번역기를 이용해

일일이 나의 의견을 베트남어로 바꿔야만이 그들과 대화가 가능했지만,

그녀는 첨부터 남달랐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소개글을 읽고는

센스있게 내가 읽기 좋으라고

한국말로 번역해서 보냈다.


그리고 페북 메신저에서 자리를 옮겨

zalo라는 생소한 베트남 메신저에서 보자는 다른 이모들과는 차별이 되었다.

자신은 카카오톡을 한다는 것이다.

준비된 사람이다.

게다가 그녀는 한국인 집에서 일해본 이모였다.


내가 보물을 만났다.

정말 사리가 나올라 말랑 할 때 만난 이모였다.


이모와 나는 카톡으로 매일 안부를 주고받는다.

내게 맘모스 라는 이름을 붙여준 당신.
비록 악마일지라도 나는 행복하다.




최선을 다하는 이모는 한국말이 무척 어려울것이다.


나를 맘모스라고,

때로는 악마라고도 부르지만 ,

아무래도 한국인집에서 일을 하며

아기들이 하는

"엄마" 또는 "맘"

이라고 부르는 것을 귀동냥으로 배운듯하다.


비록 나는 악마와 맘모스라고 불리지만.

그녀의 정성과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배우려고, 노력한 그 흔적이 느껴진다.





나머지 한분은

베트남어 밖에 할 수 없어서 걱정이 된다.

하지만 모두 비슷한 상황에서

각자 최선을 다해 해석을 하고 이해를 하며 살게 될것이다.


내가 말실수를 하더라도,

베트남이모가 내게 그랬듯,

그들도 나의 실수를 너그러이 이해해주기 바랄뿐이다.





둘째를 돌봐주는 이모가 생겨서 천만다행이다.


내 나이가 많은 만큼 나는 그들의 손길이 간절하다.


돈만 많으면 그들과 평생 함께 하고 싶지만,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 동안

우리모두가 건강하고, 무탈하기만을 바란다.


돌아보면 그때가

호시절이었노라 기억할 수 있는 지금을

행복하게 보내고 싶다.



2022.09.23

브런치 작가 정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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