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엄마라는 역할을 해내는데에 권태기 같은 것이 찾아왔는지 힘든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권태기라는 말이 맞지는 않은 것 같다만, 고1을 준비하는 아들에게 또 공부하라는 말을 애둘러 표현하기 위해 수많은 동기부여 영상과 멘트들을 준비해서 이야기 했지만 한치도 달라지지 않는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들로 인해 지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뭘 해도 한숨만 나오고, 아무노력도 하지 않는 듯 보이는 아들의 모습만 보면 가슴이 답답해지곤 했다. 어떤 이들은 사춘기 아들을 둔 부모는 옆집 아들 바라보듯 해야 한다고들 하던데, 나는 뒤늦게 아들의 엄마 행세를 하면서 아들에게 엄마라는 자리를 7년이나 비웠기 때문에 가로늦게 열정을 갖고 아들을 키워보려 안간힘을 쓰며 살아온 지난 6년이었다.
이를테면 죄책감 같은 것이다.
내가 아들에게 진 빚을 갚고자 엄마라는 자리를 꽉 채우기 위해 애를 쓰며 고군분투하며 살았다. 일부로라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 그러나 아들은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아들은 자기만의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떨 때는 내가 있으나 없으나 아들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같은 회의적인 생각이 들때도 있었다. 그러나 가끔 아들이 표현해주는 포옹이나 감사의 말들을 들으며 내 자리를 지킨 때가 뿌듯하기도 했다. 가끔, 아주 가끔 말이다.
나는 요즘 아들과 핸드폰을 떼어놓으려 핸드폰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핸드폰은 이제 너에게 죄와 같고 악과 같은 존재다! 라는 극단적인 말을 했다.
틈만 나면 핸드폰을 그저 보고만 있는 아들이 바보가 되어가는 것 같아 걱정이 되었고, 고1을 준비하며 같이 공부해본 수학 곱셈공식이나, 토플 영어단어들을 보면 정말 한 시간도 귀한데 그 시간들을 모조리 핸드폰으로 허비를 하고 있으니 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아들은 내가 없던 나의 빈자리를 핸드폰으로 메웠기에 그 틈을 사람인 내가 채우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것만 같았다.
핸드폰은 온갖 자극적인 영상들로 가득찼다.
손가락 하나로 원하는 지식을 얻을 수 있고, 끝도 없는 쇼츠와 릴스들이 쾌락의 감각들을 만족시키는데 나는 그런 핸드폰보다도 못한 엄마라는 생각이 들 때도 많았다. 그럴 때 마다 핸드폰에 대한 질투와 나에 대한 자격지심이 생겼다. 핸드폰이란 존재를 생각할 수록 내 성격이 괴팍해져갔다.
남편은 이제 아들이 고등학생이니 더 이상의 엄마 이야기는 귓똥으로도 안들을거라며 나를 말렸다.
그리고 아들 자기 인생이니 자기가 책임 질 것은 지게 하고 본인이 선택과 결정이란 것을 하게 놔두고 의지와 노력으로 인생을 살게끔 지켜보자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나는 포기하기가 싫었다.
아니, 정말 포기하고 가만 놔두고 보고 있으니 정녕 아무것도 안하고 하루 세끼 밥 먹고 핸드폰만 보는데도 걱정이 하나도 없는 아들의 모습에서 내 속은 더 타들어 갔다.
그래서 나는 남편에게 그렇게 못하겠다고 이야기 하고 아들에게 바로 달려가 무릎을 꿇고 울면서 이야기 했다.
"아들아,
네가 지난 어린시절, 엄마와 아빠가 너의 부모자리를 비웠을 때 너가 얼마나 하늘을 원망했는지 안단다. 너무 미안하다. 내가 이 말도 몇번이나 했는지 모르겠구나. 그런데 말이야.
엄마는 정말 너가 네 인생의 주인공이란 것을 알았으면 좋겠구나.
이 엄마는 너의 관객이란다.
너는 이 엄마라는 관객이 니가 다른 사람의 인생과 핸드폰 속의 세상을 바라보며 있는 것이 너무 분하고 속상하구나.
너는 우리 집안의 중재자나 참관자가 아니야.
이제 너는 엄마와 아빠, 그리고 할아버지와 할머니,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관객이 되어 지켜보는 무대위의 주인공이란다. 우리는 니가 무대위를 누비고 열정적으로 너의 인생을 살고 트로피를 받을 때 까지 너를 응원할 사람들이란다. 그리고 니가 그 무대위에 서 있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아끼지 않고 너에게 지원해 줄 거야. 모든 것들을 말이다. 우리는 지지자이자 관객이란다.
그러니 이제 그만 너의 인생을 살아내 주면 안되겠니?"
이야기를 끝마치는데 하염없는 눈물이 나왔다.
그동안 나도 내 마음속에는 항상 tv속의 연예인이나 훌륭한 동기부여가 되는 사람과 같은 동경의 대상이 있었고, 그런사람들의 삶을 핸드폰으로 엿보고 살았다. 언제나 꿈은 꿨지만 그 사람들의 인생과 내 인생은 거리가 멀었다. 나는 그 사람들의 인생을 살 수 없었고, 내 현실을 바라보니 너무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비교를 해버리고 말았다. 노력 해도 오를 수 없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삶을 동경하기만 했다.
이런 나를 보며 우리 부모님은 얼마나 속이 상하셨을까 싶었다.
언젠가는 내가 환하게 웃고 많은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얼마나 열망하셨을까. 그러나 어떤 트로피도 가져다 드린 적 없는 딸 자식을 보며 얼마나 낙심하셨을까.
그러면서 나는 또 내 자식에게 무엇을 기대한다는 말인가...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요즈음 같은 미디어 세상에서는 비단 tv속에서의 유명한 사람만 유명해지지 않쟎아. 미디어는 세상 곳곳에 사는 모르는 어느 누구라도 다 유명해 질 수 있는 시대야.
그런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 어디에 사는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릴스와 쇼츠를 보고 좋아요를 누르는데 하물며 내 자식 삶 하나에 좋아요와 하트 하나 눌러주는게 그리 큰 어려운 일일까 싶은 생각이 든다.
이제 나도 그만 남의 인생을 엿보고 아들의 인생을 응원해주고 싶다.
비록 내가 사회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지닌 사람은 아니지만, 우리 아들에게 만큼은 최고의 관객과 광팬이 되고 싶다.
그래서 언젠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상을 받을 때 까지, 그게 아니라도 소소한 일상 하나도 스타처럼 아들을 여기고 동경하고 바라봐줘야 겠다.
얼마 전 조성진 피아니스트의 콘서트 영상을 유튜브로 보면서 앉아있는 관객들을 보곤 생각이 들었다. 저 분들도 피아노에 관해 단 한가지라도 아는 사람들이 관객으로 오는 것 아닐까. 피아노소리에 아무 감흥이 없는 사람들이 관객으로 갈 수 있을까.
부모가 자식의 관객이 되려면 관객이 갖추어야 하는 소양은 적어도 무엇이 있을 수 있을까.
타고난 자질과 재능과 나고 자란 환경은 모두 다 다르지만 우리는 모두 핏줄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굳이 최고의 학자와 최고의 기술자, 최고의 선생님과 최고의 경영인이 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자식의 부모, 그 부모의 부모 모두가 비슷한 취미 안에서 평범하게 노력하고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최고의 유대감을 가질 수 있다.
엄마인 내가 앞장서서 우리 아들의 광팬이 되려고 한다.
내가 이야기를 마친 그 순간,
아들은 무언가를 다짐했다는 듯
책을 들고 자기방으로 들어간다.
그린라이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