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 더워지는 요맘 때가 되면 서해바다 어디서나 쉽게 갑오징어를 볼 수 있다.
제철 갑오징어는 씹는 맛 일품, 최고의 식감을 자랑한다. 맛있는 갑오징어를 먹을 때마다 오래전, 내가 코 흘리개시절, 해마다 이 계절이 되면 바로 뒷집에서 살던 외할아버지가 생각나곤 한다.
북녘 땅, 황해도 출신이셨던 할아버지는 전쟁 통에 동생들과 피난을 내려와 새로운 삶을 일궜다고 한다. 그 시절 일반 사람들의 삶이 그러했듯이 척박한 땅에서 삶을 일구기가 여간 녹녹지 않았었던 모양이다. 할아버지는 평생 바다에서 어부로, 농부로 살았다. 할아버지의 하루는 새벽 일찍 일어나 마당에 있는 우물에서 물을 떠 소다 한 스푼과 함께 마시는 게 첫 일과였다. 그의 첫 일과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 결 같았다. 지금도 소다를 왜 그렇게 드셨는지는 그 영문은 도통 모르겠다. 할아버지는 또한 식사 때마 다 반주도 즐기셨다. 그래서, 할아버지 집에는 도꾸리(큰 술병)가 늘 있었다. 어렸던 내 기억 속 할아버지는 술을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그런 할아버지는 가끔씩 어디서 드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흥건하게 술에 취한 날이면 집으로 가던 길에 우리 집 앞마당에 먹물 시켜먹게 뒤집어 쓴 갑오징어 두어 마리를 츤데레 툭 던져놓고 가시곤 했다.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저녁 밥상 위에는 접시 두개가 밥상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었다. 접시 하나에는 칼국수면처럼 길게 길게 자른 갑오징어회가 올려져 있었고, 다른 한 접시에는 뜨거운 물에 살짝 데친 마시멜로 마냥 말랑말랑해 보이는 숙회가 올려져 있었다.
그런 갑오징어를 빨간 고추장에 찍어, 입가에 초장이 묻은 줄도 모른 채 먹던, 코 흘리게였던 나는 세상 가장 맛있는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어 먹었다.
갑오징어는 일반 오징어와 다르게, 몸속에 갑이라고 하는 뼈대가 있어서 그 크기도 크고, 식감도 훨등히 좋았다. 동네사람들은 갑오징어를 회치고 난 뒤, 집안에 갑을 쟁여두고 일하다 다쳤을 때, 그 갑을 곱게 갈아 지혈제로 사용하곤 했다. 그 지혈 효과는 탁월했기에 상비약처럼 두고두고 사용하기도 했다. 한편, 나를 비롯한 동네 코흘리개들은 그 갑을 갖고 모래사장에서 장난감으로도 사용하기도 했고, 흐르는 물에 띄워 보내기도 했다.
갑오징어가 많이 잡히는 이 맘 때가 되면, 소주를 유독 좋아했던 할아버지가 생각난다. 할아버지는 무뚝뚝했지만, 막내 손주였던 나에게는 사탕도 챙겨주시곤 했다. 그 할아버지는 내가 중2가 되던 해, 중풍이라는 모진 병에 걸려 10년이라는 긴긴 병치레 끝에 세상과 작별을 고하셨다.
살아계셨을 때 술을 조금 덜 드시고 그 만큼만 외할머니께 잘해주셨으면 참 좋으셨으련만...
누구에게나 어려웠던 시절,
술 보다는 가족에게 의지했으면 어땠을까...
*이미지 출처 :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