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의 보석 천리포수목원에 들렀을 때는 늦더위가 한창이던 2024년 9월의 어느 날이었다.
업무차 방문한 수목원이지만 말로만 듣던 수목원을 처음 방문한 나에게는 그 설렘이 사막만큼이나 뜨거웠던 늦여름의 무더위마저도잊게 했다.
평일이지만 단체로 온 학생들부터 일반인 관람객까지 우리보다 부지런한 그들은 이미 신비에 싸인 수목원 관람에 집중하고 있었다. 해설사의 친절한 설명도 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짧은 관람시간에 한 종류라도 더 많은 것을 보기 위해 발길이 가는 대로 이리저리 바삐 움직였다.
그런 우리를 처음 반긴 건 1973-0194 꽃댕강나무다. 처음 보는 꽃이지만 별모양의 하얀 꽃잎이 인상적이다. 이 나무의 라벨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1973년에 194번째로 심은 나무라는 사실이다. 나 보다 나이로는 형인 셈이다. 소박하고 단출해 보이지만 꽃이 야무지게 피었다. 우리는 그렇게 식물 하나하나, 나무 하나하나 살펴나갔다.
그러다 1975-0689 닛사 나무와 마주했다. 형상이 예사롭지 않지만 동갑내기 친구를 만난 듯 반갑다. 이 친구는 미국이 원산지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뭔가 특별해 보인다. 방부목 테크로 나무 주변을 정돈해 보호하고 있고그 나무 아래에는 반사경으로 나무를 비추고 있다. 직감적으로 여기는 셀카포인트구나 싶었지만 수목원에서 그리 단순한 이유로 이 구조물을 설치했을 리는 만무했다.
닛사
닛사의 특징은 일반 나무와는 달리 나뭇가지가 지면을 향해 아래로 뻗어나가면서 울창한 그늘을 만드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한 여름에 마을 느티나무 그늘아래서 사람들이 쉬는 것처럼 미국에서는 이 나무 그늘은 최고의 쉼터가 된다고 한다. 그 외에도 나뭇가지가 워낙 울창하게 아래로 뻗다 보니 외부에서는 시선이 차단되어 연인들에게는 비밀데이트 장소로 활용하기에 더할 나위 없다고 한다.
천리포수목원을 대표하는 아이콘 하나를 꼽으라면 당연히 호랑가시나무일 테지만, 닛사 또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울 듯 하다. 닛사가 나에게 더 특별한 이유는 지면으로 향하는 형상을 갖고 있는 그 나무의 메시지 때문이 아닐까
늘 높은 곳만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과 닛사의 태도는 완전히 다르다.
유일하게 아래를 향해 뻗아가는 닛사 나뭇가지들을 통해, 겸손함을 배운다.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정점이 어딘지도 모르면서 맹목적으로 달려가고 있는 사람들, 물론 그중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다. 가끔은 걸어온 길을 뒤돌아볼 여유, 아래로 향하는 겸손함을 내뿜는 닛사, 산소만큼 소중한 것을 일깨워준다.
천리포수목원의 닛사는 오늘도, 내일도 사람들에게 추억 사진의 멋진 배경이 되어줄 것이고, 더운 날에는 그늘이 되어 줄 것이고,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훌륭한 선생님이 될 것이다.
이제는 사람들이 그곳을 서해의 보석이라고 일컫는 연유를 알 수 있기에 행복하다. 게다가 설립자가 '사람이 행복한 수목원이 아니라 나무가 행복한 수목원을 만들겠다'는 그의 철학을 충분히 이해하며 예전에 별관심이 없던 나무와 식물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그렇게 나에게는 아주 특별한 공간이 되었다.
그러니, 첫눈이 오면 나는 다시 천리포수목원에 가봐야 할 것 같다.
진짜 속내는 눈 덮인 빨강 호랑가시나무열매의 황홀한 빨간빛을 보고 싶은 욕망을 절제할 길이 없을 것 같고, 또 하나는 눈 덮인 닛사의 모습은 상상이상으로 아름다울 것이라는 믿음을 확인하고 한 동안 느슨해진 삶 속에서 방전된 겸손함을 다시 채워야겠다는 생각이 서해바다 밀물 처럼 밀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