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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두 얼굴

쓰기, 읽기, 쓰기, 읽기

by 바람아래

지난해 12월 3일을 기점으로 희한하게 글이 써지지 않았다.


‘그날의 충격 탓에 마음이 어수선하고 심란했다’라는 것은 좋은 변명거리 였다. 사실 그건 분명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그 이전의 시간을 되돌아보면 지난 7월 인사이동으로 부서가 바뀐 시점까지 거슬러가야 할 것 같다.


그 이전까지 정신없이 숨이 턱턱 막히게 살아왔다. 거의 매달 이어지는 해외출장의 연속. '실적'이라는 강력한 압박에 따른 팀장으로 갖는 부담, 그로 인한 피로누적 그럼에도 불구하고 틈만 나면 미친 듯이 글을 썼다.


그것은 한낮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공항 탑승전에도 그랬고, 기내에서도 그랬고, 유럽의 어느 좁은 호텔 방에서 시차로 인해 멀뚱 거리는 정신으로도 열심히 자판을 두들겼다.


비록 그 내용이 만족스럽지는 못해도 순간순간의 감정 그리고 낯선 곳, 낯선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느낀 그런 감정선을 글로 옮기려 했다. 그렇게 글을 쓰는 동안에는 모든 시름, 걱정 다 내려놓고 오롯이 글쓰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나면 지친 몸과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그 맛에 빠지곤 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부서이동에 따른 적응 그리고 지난해 12월 충격의 그날 이후. 예전의 실적에 대한 압박과 출장이라는 물리적 부담도 사라졌지만 오히려 글쓰기에 대한 부담은 오히려 늘었다. 그 와중에 게으름까지 더해졌으니 헤어 나오기 힘든 늪에 빠진 느낌이었다. 역설적으로 늘 시간에 쫓기며 살 때에는 글쓰기 소재도 넘쳤고 보는 것마다 아이디어가 넘쳐났다. 그 덕에 비록 졸작이나마 뭐라도 쉽게 쉽게 막걸리 같은 글들을 쓰곤 했다.




그런 글쓰기에 대한 게으름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을 무렵, 그 아쉬움을 대신하게 된 것은 책이다. 특히, 말과 언어에 대한 책들을 통해서 글쓰기에 대한 필요성을 다시 인식하게 되고, 거장과 고수들의 살아 있는 문장을 보면서 이제는 ‘양’보다 ‘질’에 신경을 써야겠다는 각성이 있었다. 거장들의 좋은 문장, 아름다운 문장을 통해 나의 글을 조금 더 탄탄하게 하고 싶다는 소망이 샘물처럼 솟아났다.


나를 각성하게 해 준 대표적인 책으로는 얼마 전에 소개했던 이어령 선생의 생전 말과 글들의 에센스라 할 수 있는 '이어령의 말',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일상생활 속 평범한 단어들에 대해서 작가의 체험을 통해 그 의미와 가치를 편하게 설명해 주는 '보편의 단어(이기주)', 그리고 우리 문학 속의 아름다운 우리말과 글을 세프의 눈과 감성으로 끄집어낸 '글자들의 수프(정상원)'를 재미있게 읽었다. 물론 그 외에도 '자유론', '신곡' 등과 같은 고전은 물론 '넥서스', '코스모스(2달째 읽고 있는 중)'와 같은 유명저서에도 도전을 했다. 그리고, 지금은 '청춘의 독서(유시민)'를 기다리고 있다.


쓰기에 대한 아쉬움을 글쓰기 고수들의 책으로 메우고, 그렇게 책을 읽다가도 정신이 산만해지면 그 책에 밑줄 그은 문장들을 곱씹으며 다시 자판을 두들기기를 반복했다. 그렇다 보니 이제는 시간이라는 요물에 내가 끌려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나 스스로 그 시간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노력 중이다. 하지만 생각만큼 그게 참 쉽지는 않다. 나의 시간이 게으름 외에 알고리즘에 지배되지 않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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