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애보는 단톡방이 아닌 가슴에나 묻어둬
"아, 이 양반 취했나. 이 시간에 왜 이러는 거야."
탁상시계가 11시를 향하고 있는 토요일 밤이었다. 한동안 읽지 못했던 브런치 작가들의 글을 하나씩 펼쳐 들며, 타인의 삶에 녹아든 문장들로 지친 영혼을 달래고 있었다. 음악이 고요히 흐르는 위안의 시간, 뜬금없이 대학 동기 단톡방에 메시지가 떴다.
"현아야~ 오빠(세철)가 밥 살게 홍상미 찾아서 다른 애들 빼고 정태 불러서 밥 한 번 먹자!"
(전부 가명임)
앞뒤 맥락 없는, 갑작스러운 이 메시지에는 한참이 흘러도 아무런 댓글이 달리지 않았다. 보는 내가 더 민망했다. 새해 안부 인사라도 써줄까 하는 마음도 있었으나, 저 문장에 내 이름은 없었다. 호명된 세 사람만이 답할 수 있는 상황. 나뿐 아니라 다른 동기들도 댓글을 달기엔 어색하기만 했을 것이다.
토요일 밤, 맥락 없이 던져진 저 메시지를 바라보다 문득 궁금해졌다. 메시지를 보낸 그 양반의 속마음이. 여러 상황을 추정해 보니, 어디선가 술잔을 기울이다 혼자 감성에 젖어 대학 시절과 동기들이 떠오른 게 아닐까. 과거 어쩌다 만날 때면 감정에 휩쓸려 갑자기 생각나는 사람들에게 아무 때나 연락하는 습관, 그에게는 늘 그런 면이 있었다.
사실 세철은 동기이긴 하나 신입생 중 드물게 예비역 출신이어서 나보다는 형이었고, 동기들 사이에서 구심점 역할을 하곤 했다. 그 시절 세철은 늘 홍상미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우리 앞에서는 씩씩하고 유머러스한 리더였던 그가, 희한하게도 홍상미 앞에서만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닫았다. 아무 말도 못 했다.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남자 동기들은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입대했다. 그 사이 세철과 홍상미를 비롯한 여자 동기들은 학교를 함께 다녔고, 함께 졸업했다. 우리가 군에서 제대하고 복학하는 동안 세철이 홍상미에게 단 한 번이라도 고백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이야기는 동기들 사이에 30년째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세철과 여자 동기들은 우리보다 몇 년 앞서 졸업했고, 먼저 취직하고 각각 결혼해서 가정을 꾸렸다. 다행히 각자 잘들 살고 있다. 그런데 동기 단톡방에는 대부분이 등록되어 있지만, 애초부터 홍상미의 이름은 없었다. 지금은 그녀의 소식을 아는 사람이 없다.
어쩌다 가까운 곳에 사는 동기들끼리 모일 때가 있다. 세철은 종종 홍상미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그때마다 우리는 물었다. "형, 그때 고백이라도 좀 하지 그랬어?" 그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술이나 먹어!"가 그의 유일한 대답이었다.
그랬던 그가 뜬금없이 차가운 겨울, 주말 늦은 밤에 단톡방에 저런 메시지를 올렸다. 그가 제일 보고 싶은 건 홍상미인 듯한데, 그렇다면 나머지 현아, 정태는 요즘 말로 '깍두기(들러리, 아웃사이더, 병풍)'가 분명하다. 그런데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이제 와서 만나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이 글을 쓰는 동안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 가사가 떠오른다.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가버린 세월이 서글퍼지는
슬픈 뱃고동 소릴 들어보렴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에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사람이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30년이 흘러도 여전히 가슴 한편에 남아 있는 그 이름. 어쩌면 세철에게 홍상미는 영원히 닿을 수 없는 '다시 못 올 것'인지도 모른다. 그 시절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못 하던 청년이, 지금은 중년이 되어 술기운에라도 기대지 않으면 그 이름을 꺼낼 수 없는 것일지도.
그래서 이해는 한다. 못다 한 말들이 가슴 어딘가에 여운처럼 남아 있다는 것을. 나이 들수록 그 무게가 가벼워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무거워진다는 것을.
하지만 각자 가정이 있는 사람들이고, 공개된 단톡방이며, 무엇보다 호명된 이들의 마음을 생각하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평소 연락도 자주 하지 않다가 갑자기 호출되어 당혹스러울 세 명의 '깍두기'들, 당사자인 홍상미가 느낄 부담감, 단지 '그냥 술김에 갑자기 생각나서' 정도의 감정 몰입이었기를 바라는 건 어쩌면 내 바람일 뿐인지도 모른다.
그의 짧은 메시지는 가벼워 보이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만큼은 무거웠을 것이다. 다만 그 무게를 표현하는 방식이 서툴렀을 뿐.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서툰 우리는, 감정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는 채 어설픈 방식으로 손을 내밀 때가 있다. 그게 때로는 누군가에게 민망함이 되고, 불편함이 되고, 부담이 된다는 걸 미처 헤아리지 못한 채.
당장이라도 만나면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황순원의 소나기에 나오는 소녀와 소년 같은 이야기는 이제 가슴에나 묻어둬, 세철이 형! 어쩌자는 겨!"
아니나 다를까, 이 일이 있고 이틀이 지난 뒤 다른 친구 한 명에게 개인 톡으로 연락이 왔다.
"세철이 형 왜 저러는지 아냐?"
" 내가 어떻게 알겠어, 알다가도 모를 사람의 마음을..."
[대문사진 : Damien Hirst I Love You - Red/Oriental Gold/Cool Gold, 2015(실크스크린 판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