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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아래 Mar 19. 2023

02 금발의 그녀, 온 마을을 뒤흔들다

TV로만 봤던 외국인이 시골 바닷가 마을에 나타났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즈음, 우리 동네는 아스파팔트나 시멘트로 잘 정돈된 길이 아닌 비포장 도로여서 택시나, 트럭이 지나가면 뿌연 흙먼지가 사람들의 시야를 막곤 했다. 읍내에서 우리 동네를 찾아오기 위해서는 비싼 택시를 타거나, 40 여분을 흙먼지를 뒤집어쓰면서 걸어야 했다.      


그런 시골 바닷가 마을에 봄 아지랑이 피어나는 계절, 아마 4~5월 즈음으로 기억되는 어느 날 우리 동네에 TV나 영화에서 봤던 금발의 백인 여성 혼자 배낭을 짊어지고 나타났다. 그 당시에는 외국인은 서울이나 가야 볼 수 있을 때였다. 그런 시절에 우리 동네에 나타난 낯선 이방인은 그날 평화로웠던 시골 마을을 발칵 뒤 집어 놨다.

    

그 이방인의 출몰(?)을 사람들은 신기해하면서도 눈이라도 마주칠까 무서워 딴청을 피우기도 했다. 그녀 또한 그런 우리 동네 사람들을 신기한 눈빛으로 보면서 걸어 다녔다. 길을 가던 그녀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두리번두리번거렸다.


갑자기 그녀는 용기를 냈는지 씩씩하게 동네에서 그나마 젊은 편에 속하는 ‘박 씨’ 아저씨한테 다가가더니 갑자기 뭐라고 “쏼~라 쏼~라”를 연신 외쳤다. 순간 당황한 박 씨 아저씨는 당연히 당최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박 씨 아저씨는 “아 뭔 소리여? 당최 뭔 소린지 못 알어 듣것어! 뭐라고? 환장 허것어~”를 계속 반복했다. 뭐라고 계속 떠들던 그녀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몇 분간 실랑이를 하던 박 씨 아저씨는 마치 유레카를 외치듯 좋은 생각이 났는지, 갑자기 언덕 위에 있던 우리 집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그녀에게 온갖 손짓 몸짓을 하더니 그녀를 데리고 우리 집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밝은 표정으로 우리 집 문을 열고 들어온 아저씨는 이 광경을 목격하고 있던 나에게 “니네 형, 00이 학교 갔다가 집에 왔냐?”라고 물었다. “방에 있는 거 같은데요”하고 대답을 한 뒤 나는 뭔가 잘 못 되어가고 있다는 불길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아무 상황도 모르고 소환된 우리 형은 박 씨 아저씨와 함께 있는 낯선 이방인, 이 둘의 조합은 뭔가 싶은 표정이었고 대략 난감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박 씨 아저씨는 불과 몇 분 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게 조금은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우리 형은 우리 동네에서 영어를 배우는 단 2명의 인텔리 중 한 명(다른 한 명은 막내 외삼촌)이었고 나름 학교에서 공부를 좀 한다고 소문이 나있던 터라, 그에게 우리 형은 이 상황을 해결해 줄 유일한 구세주와 같은 존재였던 것. 


00야, 니가 학교에서 영어 배우니께, 이 사람이 뭔 소리 하는지 좀 들어봐라 겁나게 갑갑해 죽겄어”하면서 형의 등을 떠밀었다.       


갑자기 사지(?)에 몰린 형도 난감하긴 매 마찬 가지, 학교에서 기껏해야 듣기 평가 때 카세트 테이프로 어쩌다 들어본 외국인 발음이 전부였던 형도 이 상황을 모면할 뾰족 한 전략이 없었다.


그녀도 어린 학생이 차라리 낫겠다 싶었는지 형에게도 아주 짧은 외마디 “쏼~라”하고 했다. 그녀가 반복적으로 하는 “쏼~라”는 박 씨 아저씨, 형 그리고 나까지 모두 궁금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역시 배운 사람은 달랐다. 그때 형은 용기를 내며 결심한 듯, 갑자기 집에 있던 전화기(다이얼이 아닌 검은색 구식 전화기, 동네에 몇 대 없던 전화기가 우리 집에 있었음, 우리 집은 그 당시 나름 얼리어덥터였음)를 들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형이 다니던 중학교 교무실이었다.


“저, 2학년 000인데요, 우리 집에 어떤 외국 여자가 와서 뭐라고 하는데 전혀 모르겠어서 그러는데, 영어 선생님하고 통화 좀 하게 해 주세요?”하고 영어 선생님을 찾았다. 이방인은 수화기로  영어 선생님과 몇 마디 주고받은 뒤 다시 형에게 수화기를 넘겼다. 수화기를 넘겨받은 형은 영어 선생님과 잠시 대화를 하면서 “아, 네, 네, 네, 네”만 연신하더니 인사를 하고 끊었다.    

 

이제야 알았다는 듯 형은 밝은 표정으로 “비치”라는 외계어 같은 말을 던졌다, 그녀도 이제 됐다는 듯 방긋 웃으면서 “예스”로 화답했다. 그 옆에 갑갑해하며 서있던 박 씨 아저씨도 직감적으로 이제 됐다 싶었는지 안도하는 분위기였다.


그러고는 “00야, 이 여자 뭐라고 한겨?”하고 물었다. 형은 “해수욕장에 가고 싶은가 봐요, ‘비치(Beach)’가 해수욕장이라고 하네요, 선생님이 가까운 해수욕장을 알려주면 된다고 했어요”하고 답했다.


그제서야  그녀를 비롯한 우리 모두 한 바탕 웃었다. “그말이 해수욕장이었구먼, 아이고 잘했다 00야”하며 박 씨 아저씨는 속 시원한 듯한 한 표정을 하며 그녀를 바로 언덕 너무 바닷가 방향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그녀가 계속 반복적으로 했던 그 의문의 “쏼~라”는 “Beach”였던 것이다. 지금도 잊지 못하는 그날의 웃긴 해프닝 이후 나는 영어에 대한 더 큰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나중에야 알게됐는데 그녀는 캐나다에서 온 대학생으로 당시 우리나라 방방곡곡을 여행 중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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