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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아래 Mar 23. 2023

04 일본 여고생들과의 보디랭귀지

외국인들과 인생 첫 대화

#1

고등학교를 멀리 공주로 유학을 갔다. 지역에서는 꽤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남자 고등학교였다. 그 학교는 한 반에 50명이 넘는 학급이 12반까지 있었다. 학교 정문에는 족히 수 백 년의 세월을 버틴 거대한 은행나무가 있고, 교사 뒤편에는 넓은 운동장과 야구장이 펼쳐져 있는 학교였다.

    

화창했던 어느 날 오후 갑자기 수백 명의 일본 남녀 고등학생들이 학교에 왔다. 그 당시 영문도 모른 채 교실 밖으로 끌려 나온 우리들은 선생님들의 지시에 따라 그 일본 학생들 사이로 몇몇 씩 섞여 잔디밭에 앉았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설명도 없이 대화의 시간을 가지라고 했다.


그때 나는 워낙 숫기가 없어서 낯선 사람들과 얘기하는 것을 몹시 부담스러워할 때였고 더군다나 낯선 외국인 여학생을 직면 한 건 초5 때 우리 동네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캐나다 여대생 해프닝 이후 처음이었으니 난감하기는 이루 말할 데가 없었다. 물론 나만 당황스러운 건 아니었고 반 대부분의 학생들은 어리둥절했다.

    

어찌 되었던 이 반갑지 않은 시간을 어떻게든 때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남자들로만 득실거리는 남고에 낯선 외국 학생들이 와있다는 것도 낯설었다. 하지만 누구든 먼저 아이스브레이킹을 해야 되는 순간의 연속. 우리 그룹에 속해있는 친구들은 서로 눈치 게임을 하듯 서로 눈치만 봤다. “야 네가 먼저 뭐라고 좀 해봐!”라는 신호를 눈에서 눈으로 전달하는 듯했다.   

  

그때 한 일본 여고생이 갑갑했는지 부끄러워하며 작은 쪽지를 우리에게 먼저 건넸다. 거기에는 그냥 한자로 자기 이름이 쓰여있었다. 그러자 일본 학생들도 우리처럼 영어를 전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때부터 필답(筆答)과 보디랭귀지가 난무하는 시간이 되었다. 한 녀석은 필답으로 ‘name‘을, 또 다른 녀석은 ’Boy friend?’를 대부분 이런 식의 수준 높은(?) 필답이 한 동안 오갔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흐르고 익숙해졌는지 양 측 학생들은 필답도 귀찮은 듯 One-word Talking과 보디랭귀지로 무리 없는 소통을 이어가는 놀라운 경험을 목격했다. 물론 전부 그런 건 아니고 그 와중에 일본 학생들 중에는 한자로만 답을 한다거나, 그냥 웃음으로 때우거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학생들도 있었다.


조용한 성격이었던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지금 그 장면을 다시 떠올려 보면 그 당시 한국과 일본의 영어교육의 문제점을 여실히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영어 학습이라고 해야 겨우 문법 위주였으니 가장 기초적인 회화 한 문장 제대로 말하지 못할 수밖에...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던 건 “이래서 영어를 공부해야 되는구나” 하는 동기부여가 됐다는 점이다.

그 일본 학생들은 일본 규슈 지역에 있는 구마모토현에서 온 학생들이었다. 당시 충청남도와 구마모토현이 자매결연 관계였는데 그날은 ‘자매결연 00주년 기념 양 지역 청소년 간의 대화의 시간이었다’는 것을 최근에서야 알게 됐다. (2023년은 충청남도-구마모토현 자매결연 40주년)       




#2

고2가 되던 해, 영어선생님은 화끈하셨고 수업에 늘 진심이셨다. 게다가 학생들과의 밀당은 고수 중의 고수였다. 물론 수업시간에 잠을 자는 학생에게는 자비 없는 페널티를 부여했다. 그렇더라도 학생들은 어김없이 수업이 조금 지루하고 졸리기 시작할 때 즈음 선생님에게 군대나, 첫사랑 얘기를 청하곤 했다. 그때마다 선생님은 빼는 듯하면서도 참 맛깔나게 이야기를 해주셔서 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꽤 많으셨다.


어느 날 선생님은 젊은 미국인 남자 2명을 수업에 데리고 나타나셨다. 그들은 항상 흰색 셔츠와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고 다녔다. 선생님은 일주일에 한 번씩 영어 시간에 이들과 영어 공부를 하겠다고 선포하셨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은 교실 뒤편에서 학생들과 그들 간에 소통이 안 될 때만 흑기사처럼 나타나 통역을 해주셨다. 그때 선생님이 그들과 영어로 대화하는 모습이 무척 멋져 보였다. 그래서, 나도 용기를 내어 자기소개도 해보고, 그 뻔한 Cliche “Do you have a girl friend?, What’s your hobby?” 이런 질문들을 연발했다. 그렇게 몇 달을 그 사람들과 수업을 하면서 외국인과 길게는 아니지만 짧게라도 대화를 통해 나름 자신감을 갖는 계기가 됐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사람들은 미국에서 온 모르몬교 선교사들이었고 그들은 항상 말끔한 정장 차림으로 공주 시내를 돌아다녔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는 종교가 뭔지도 모를 때라 종교에는 전혀 관심 없었고 우리는 서툰 영어로 젊은 백인 남성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돌이켜보면 그때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진짜 미국 발음을 듣게 하고, 그들과 서툴지만 회화를 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으셨던 나머지 그들을 수업 시간에 초대하셨던 것 같다. 선생님의 그런 노력 덕분에 경험 한 고등학교 시절의 이런 추억들이 내 인생에 적지 않은 긍정적 영향을 준 것은 분명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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