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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없는 작가 Sep 03. 2024

그날은 달도 비밀을 지켰어

  사과가 택배로 배달되었다. 사과 과수원을 하는 지인이 보낸 것이다. 제법 묵직한 걸로 보아 올해 사과 농사는 풍년인가 보다. 택배 상자를 열었다. 빨간 홍옥이 가득하다. 사과 따느라 애쓴 지인 얼굴이 상자 안에서 빨갛게 웃고 있다. 사과를 소분해 냉장고에 넣고 몇 개를 식탁에 두었다. 

  아침햇살이 빨간 홍옥을 밀치고 들어와 더 빨갛다. 사과 한 개를 깎았다. 사과 한 쪽을 먹기도 전에 벌써 침이 고인다. 과즙이 그득한 사과를 한 입 베어 문다. 참 달콤하다. 사과를 씹으면서 달콤하고 살벌했던 첫서리에 관한 추억이 떠오른다.

  숙이네 집에서 조금만 더 내려오면 마을 공동 빨래터가 있다. 그곳은 우리의 아지트였다. 거기서 기다리면 친구들이 하나둘 모였다. 과수원집 숙이는 사과 궤짝에서 꺼낸 사과를 한 아름 안고 왔다. 주로 벌레 먹거나 흠집이 있었다. 그것도 달았다. 그날 밤, 우리는 우물가에서 어깨를 맞대고 정신없이 사과를 먹었다. 

  배가 그득해지자, 이제는 몸이 근질근질했다. 재미난 일이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돌아보니 친구들 눈에서도 불꽃이 튀었다. 먹다 남은 사과를 한 쪽에 밀쳐 두고 모두 일어났다. 숙이네 창고에 들어가 빈 포대 하나를 꺼냈다. 여기에 가득 따서 오자는 약속 하고 빨래터를 벗어났다. 삼삼오오 나누어 조심스럽게 사과밭에 숨어들었다. 정신없이 사과를 따서 포대기에 담는데, 소리가 왜 그리도 크게 나는지. 

  “이런 도둑고양이를 봤나!”

   맑은 달밤의 적막을 뒤흔드는 소리였다. 웅성거리는 남자 목소리가 들렸고 퍽퍽 매질하는 소리가 났다. 우리는 사과나무 아래에 몸을 웅크리고 숨었다. 숨을 죽이며 소리 나는 쪽으로 귀를 열었다. 잘못했다고 용서를 비는 소리와 크게 혼내는 동네 오빠들의 음성이 들렸다. 혼쭐나는 친구들은 모두 남자아이들이었다.

  사과 서리를 멈추고 쪼그리고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과나무에 시커먼 달이 걸려 있었다. 하늘빛이 급하게 변하고 사위는 고요했다. 달님이 마치 우리를 나무라는 것 같았다. 남자아이들이 걱정되었다. 한참을 혼내더니 동네 오빠들은 돌아갔고, 친구들의 흐느끼는 소리도 잦아들었다. 우리는 그제야 나무 아래서 나왔다. 서리한 사과를 나무 아래 그대로 두고 과수원에서 벗어났다. 바로 동네 우물가에 갈 수가 없었다. 여자아이들은 동네를 빙 돌아 늦게 우물가에 갔다. 거기서 남자아이들을 한참 기다렸다. 

  빨래터에 비치는 달빛에도 겁이 났다. 훤한 달빛에 선뜻 나오지 못하고 나무 뒤에 한참을 숨어 있었다. 숨소리조차 죽이며 남자친구들을 걱정했다.

  발 없는 소문이 동네를 몇 바퀴 돌았다. 같이 사과 서리를 갔지만 여자아이들의 이야기는 쏙 빠졌다. 지난밤에 남자아이들이 숙이네 사과 과수원을 서리한 이야기만 소문이 돌았다. 며칠 동안 남자아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동네 선배들한테 서리하다 들켜서 맞았다는 이야기만 골목을 가득 채웠다. 

  시골 마을에서 같이 자란 우리 또래는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았다. 주로 여자들이 주도해서 온 산천을 돌아다닌 것 같았다. 그날 밤 사과 서리를 하자는 이야기도 아마 여자 친구들이 먼저 꺼냈지 싶다. 그런데 벌을 받은 것은 남자친구들이었다. 아무도 그날의 일에 대해 변명이나 원망하지 않았다. 

  첫서리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과수원 주인집 숙이를 앞세우고 사과 서리를 했지만, 숙이네와 관련 없는 동네 오빠들에게 들켜 남자친구들이 혼나는 사건이었다. 남자친구들은 여자친구들이 꼬드겨서 그랬다고 불지 않았다. 달도 우리의 소행을 빤히 내려다보았지만 고자질하지 않았다.

  남은 사과를 다시 입에 넣는다. 사과즙이 입안에 가득하다. 달콤하고 살벌했던 추억이 생각나 웃음이 난다. 

  내 친구 다섯 숙이와 경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비밀은 지키는 것이라는 것을 알려준 남자친구들은 또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사과 서리에 관한 기억의 한 페이지를 공유하고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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