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유없는 작가 Sep 03. 2024

기웃기웃, 누구를 기다리는가

산들 어디에나 초록이 짙다. 여름이 무르익어간다는 말이다. 꽃자리 다투며 피는 봄꽃이 한바탕 지나가면 여름꽃이 하나둘 꽃술을 활짝 펼친다. 나무 위에서 매미 울음소리 울창한 여름날, 담장 위에서 바깥을 내다보는 꽃이 있다. 능소화다.

  능소화는 담쟁이넝쿨처럼 덩굴식물이다. 빨판이 있어 어디든,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달라붙는다. 주로 시골의 돌담에 피어 고즈넉함을, 도시의 시멘트 담에 올라 따스함을 준다. 붉은 벽돌담까지 친근하고 익숙하게 기어오른다. 담장에 올라 치렁치렁 꽃줄기를 간드러지게 늘어트린다. 

  꽃의 색깔이 붉지도 노랗지도 않아 ‘붉노랑’이라고나 할까. 원뿔 모양의 꽃차례에 붙어 많이 필 때는 담장을 모두 뒤엎을 정도다. 한 번 피기 시작하면 초가을까지 피고 지기를 이어간다. 그러다가 꽃은 햇볕 무더기, 한 무더기 안고 통째로 댕강 떨어진다. 능소화의 꽃은 땅에 떨어져도 볼품을 잃지 않는다. 화려한 꽃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고 오랫동안 그대로 있다.

  능소화 꽃말은 기다림이다. 간절한 기다림을 모티브로 문학에서 여러 사람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다. 안동에서 ‘원이 엄마의 편지’가 발견되었는데, 1582년 31세의 나이로 죽은 이웅태의 아내 원이 엄마가 남편에게 쓴 편지이다. 이 편지가 일부 공개되어 많은 사람이 눈물을 쏟았다. 소설은 능소화꽃을 배경으로 이들은 능소화가 곱게 피던 날 만났고, 꽃이 만발하던 날 헤어졌다. 그리고 다시 능소화를 피워 남편이 찾아올 수 있게 하겠다는 내용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남편을, 아내를 향해 어떠한 마음을 가지는가. 무심하게 지나쳤던 배우자를 유심하게 살펴보자. 밥벌이를 위해 이곳저곳 다니느라 한쪽으로 닳은 남편의 구두, 자존심 하나만으로 당당할 것 같았지만 세상에 타협하느라 갈수록 처진 어깨, 맑고 영롱하게 꾸었던 꿈이 언제인지조차 모를 정도로 빛을 잃어가는 눈빛을. 그런 배우자를 향하여 능소화 같은 사랑 한 송이 피우는가.

  능소화의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 소화라는 이름의 예쁜 궁녀는 임금님과 하룻밤의 인연을 맺었다. 그 후로 임금님은 소화를 다시 찾지 않았다. 소화는 행여나 임금님이 이곳을 지나갈까, 소화를 찾아올까, 매일 담장 너머에 고개를 빼서 임금님을 기다렸다. 후궁인 소화가 임금님을 그리며 한평생을 보내다 궁궐 담장 아래에서 꽃으로 피었다. 그 꽃이 소화를 닮아 능소화라고 한다. 얼마나 기다리고 그리웠으면 꽃으로 피어날까, 얼마나 보고 싶으면 한여름에 지치지 않고 예쁜 꽃으로 보여줄까, 한결같은 짝사랑은 꽃으로 피어나기도 하는가 보다.

  친정집 담장에도 능소화는 피어 있었다. 아버지는 늘 자식을 기다렸다. 설핏 불어오는 바람에도 화들짝 놀라며 밖을 내다보았다. 담장에서 떨어지는 꽃잎 하나에 몸은 대문을 향했고 마음은 마을 어귀에서 서성였다. ‘쯧쯧, 누구 기다린다고 저리 곱게 앉아 있누,’ 담벼락에 기댄 능소화를 향해 아버지는 중얼거렸다. 객지로 떠난 자식들은 서쪽 하늘에 해가 누울 때쯤 드문드문 전화했다. 

  자식들은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우지 못했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향해 때로는 짧게 때로는 길게 헛기침으로 표현했다. 그런 마음을 알면서도 자식들은 소홀했고 늘 데면데면했다. 어머니가 가꾸던 마당 한쪽의 텃밭은 날이 갈수록 쪼그라들었지만, 대문 옆 담장 위로 능소화는 줄기차게 꽃을 피웠다. 

  아버지는 떠났지만, 시골집 담장에서 능소화의 기다림은 그치지 않았다. 꽃잎 하나를 떨어뜨리고 안방을 기웃대도 인기척이 없다. 동트는 시간에 텔레비전 켜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저녁 무렵에 마당에서 들리는 슬리퍼 끄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니 내일이면 아버지가 기다리던 자식들이 대문을 들어설까 기대해 본다. 숱한 날 해가 뜨고 지기를 반복했지만, 시골집은 적막이 집어 삼켜버렸다. 능소화도 지칠 대로 지쳐 몇 해 만에 시들어 말라버렸다. 

  능소화는 무엇을 보려고 저리도 애쓰는 것일까. 솔개그늘 하나 없는 담장 위에서도 화려한 꽃을 피워 놓는다. 작달비가 내려도 천둥 번개가 내리쳐도 누군가를 기다리며 고개를 쭈욱 내민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쳐 꽃은 떨어지고 말지만, 떨어져도 전혀 추해 보이지 않고 예쁨이 그대로다. 목이 잘린 채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어도 그리움은 한 송이 꽃으로 남는다. 

  저기, 세월의 담 너머로 목을 뺀 채 바깥을 기웃거리는 당신, 이 여름에는 또 누구를 기다리시는가.





keyword
작가의 이전글 그날은 달도 비밀을 지켰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