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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연 Mar 11. 2021

나에게 맞는 재료 고르기

고민의 시작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했다면, 도화지 앞에 마주하지도 못한 채 가장 먼저 드는 고민이 있다. 바로 나에게 맞는 미술 재료를 선택하는 것이다. 학교에서의 미술시간, 그리고 입시 미술에서의 그림 그리기는 선생님이 지정해주신 재료를 이용하여 어떤 주제에 맞게 어떻게 그림을 그릴까에 대한 고민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의 지도 없이, 자발적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어떤 재료'를 이용하여 그림을 그릴 것이냐부터 고민의 시작이 된다.


먼저 재료를 구매하기 전, 수많은 sns에 올라온 다양한 그림들을 찾아본다. 어떤 작가는 *디지털 드로잉으로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또 다른 작가는 붓을 이용하여 도화지 위에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넘쳐나는 정보 속에서 세상에 잘 그리는 사람은 많고 재료의 종류는 더 많다는 것을 깨닫고, 시작은 못한 채 점점 눈만 높아지는 나를 발견하기 쉽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디지털 세상에서 벗어나 직접 화방에 가보기로 한다. 한 손에는 재료를 담을 바구니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수많은 재료들을 검색해줄 핸드폰을 꾹 쥔 채 비장한 마음으로 화방을 둘러본다. 가장 친숙한 재료, 연필과 수채화부터 조금은 낯선 아크릴, 유화, 파스텔 등 다양한 재료들을 눈으로 일단 훑는다.  한번 쭉 살펴보고 가격이 비싼 재료, 유화는 우선 순위권 밖으로 밀려난다. 수채화는 입시 미술 때 사용한 재료라서 집에 충분히 있기 때문에 수채화도 순위권에서 멀어진다. 그렇게 이런저런 고민들을 하고, 제일 처음에 화방에서 순순히 나의  의지로 산 재료는 아크릴이었다. 아크릴 물감 중에서도 그 종류가 다양했는데, 우선 초심자의 마음으로 너무 비싼 재료를 섣불리 구매하기보다는 가장 저렴한 재료로 다양한 그림을 그려보자 라는 마음으로 오랜 시간 고민 끝에 재료를 구매했다.


뿌듯했다. 아직 그림 그리기를 시작하지도 않았지만, 온전히 나의 의지로 선택한 이 재료들이 날개를 달고 내 그림을 멋지게 그려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집에 가는 발걸음이 너무 가벼웠다. 어서 빨리 집에서 도화지를 펴고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커져갔다.


제일 처음 재료를 구매하고, 방 한켠 작은 책상에서 그림을 그릴 때의 순간을 잊지 못한다. 물감이 붓을 따라 종이를 채워가는 느낌이 너무 좋아 밤을 새운 적도 많다. 어렸을 때는 몰랐지만, 사회에 나가보니 온전히 나의 의지만으로 진행되는 일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많은 이해관계가 존재하고 이해관계 속에서 나의 위치를 명확하게 표출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이 어려웠다. 그러나 그림과 나 사이에서는 굳이 나라는 존재를 이해시키지 않아도 된다. 내가 그림이 좋아져 밤을 새우도록 그려도, 그림 그리는 게 싫증이 나서 재료를 방치하고 쳐다보지 않더라도, 다시 그림에게 돌아가면 언제든지 그 자리에 다시 깔끔한 하얀색의 종이처럼 나를 기다려 준다.


지금은 제일 처음에 구매했던 재료들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몇 년 동안 수많은 재료들과 함께했고, 아직까지 나와 함께 호흡을 맞추고 있는 재료들도 있는 반면, 내 호흡과 조화를 이루지 못해 서랍 깊숙이 들어간 채 나오지 못하고 있는 재료들도 있다. 얼마나 더 재료에 대한 고민을 해야 정착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루하루 느린 호흡으로 그림을 채워나가다 보면, 재료도 그림도 나도 조화를 이루는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


요즘 나와 호흡을 함께하고 있는 '오일파스텔'




*디지털 드로잉 : 컴퓨터나 디지털 기기를 이용하여 이미지를 그리는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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