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 내는 연습
미술 재료를 어렵사리 골랐다면, 또다시 마주해야 하는 고민 앞에서 머뭇거리는 모습을 발견한다. 눈 앞에 놓인 하얀색 종이는 나를 머뭇거리게 만들만한 명분이 충분했다.
'텅 비어있는', '정해지지 않은 길'
눈 앞에 놓인 도화지는 이런 느낌이었다.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지도 모른 채, 그림을 그리고 싶은 열망만으로 구매한 재료들은 나를 다시 한번 고민의 늪으로 빠져들게 했다.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는 일을 스스로 해내는 느낌이었다. 어느 누구도 그림을 그리라고 강요한 사람은 없었다. 이 길이 옳은 길이라고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저 순순히 내가 좋아서 시작한 일이었다. 그러나 텅 비어있는 하얀색 종이는 내가 채워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인지, 실수를 해서는 안될 것 같은 느낌 때문인지 섣불리 시작할 수 없는 어려움이었다. 어렸을 때는 이런저런 별다른 고민 없이 그림을 가득 채우는 것이 쉬었는데, 성인이 된 후에는 한 획의 시작부터 고민의 시작이었다. 애꿎은 연필을 들고 밑그림을 위해 종이 위에서 헛돌기를 반복하면서 이 부분에다가 이렇게 그려야 할지, 저 부분부터 시작해야 할지 점점 자신감을 잃어가는 모습이었다. 사실 지우개로 지우면 쉽게 지워지는 일인데, 그마저도 덜컥 겁이 났다.
그렇게 오랜 고민과 느린 속도로 종이들을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몇 시간이 걸렸던 고민은 이제 어느 정도 용기가 생겨 오랜 고민 속에 머물기보다는 종이를 채워나가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내 안에 담겨 있는 고민들이 손 끝에서 풀려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리 어렵지 않은 시작일 텐데, 그때는 무엇이 두려워서 시작을 하지 못한 것일까 생각이 든다.
용기를 내는 것도 연습이 필요한 것 같다. 어린 시절의 나는 많은 걱정이 없어 용기를 내기 쉬운 상태였다면, 성인의 나는 실패하기를 두려워 시작도 못한 채 용기 앞에서 의기소침해지는 느낌이다. 어쩌면 그림을 계속 그리는 일은 용기를 내는 연습부터가 아니었을까?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용기를 내서 그림을 그리고, 내 안의 고민들을 스스로 풀어보기도 하는 그런 연습들이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고, 지금도 계속 단단해지는 연습을 하고 있는 중인 것 같다. 실패가 두려워 주저하는 모습보다는, 단단한 그림을 위해 용기를 가지며 다시 또 흰 도화지를 차분하게 채워나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