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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연 Mar 21. 2021

나는 그림을 왜 그리는 걸까?

쉼표

처음에는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일이 너무 재미있어서 시작한 일이었다. 그날그날 생각나는 그림들을 그렸고, 그림을 그리면서 큰 뜻을 두고 그리지 않은 날들이었다. 영화를 보고 인상 깊었던 장면을 그리기도 하고, 유명한 배우를 그리거나 상상 속의 인물을 그리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저 그림을 그리고 파일에 담아두고 혼자서 즐기는 날들이 많았다. 그러다 문득 그 그림들을 누가 알아봐 줬으면 좋겠는 마음이 들었고, 나도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서 인스타그램에 한 장씩 그림들을 업로드하기 시작했다. 점점 좋아요 수를 신경 쓰기 시작했다.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닌, 많은 사람들이 좋아요를 누를 수 있는 그런 그림들을 그리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나의 그림들은 타인이 누른 좋아요의 숫자에 따라 점수가 매겨졌다.


영화 빅피쉬 중에서 / Colored Pencils on Paper


나는 왜 그림을 그리는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은지 이런저런 고민에 사로잡혀 그림 앞에서 머뭇거리고 주저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겨우 용기를 내서 그린 그림들은 못난 그림으로 취급해버리고, 차마 버리진 못하고 파일 깊숙이 넣어두었다. 오랜 고민의 연속을 해결해준 사람은 엄마였다. 그날도 역시 아침까지 잠들지 못한 채 밤을 새운 상태였다. 나는 엄마한테 밤새 그린 그림들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엄마, 내 그림 속 사람들은 어딘가 이상한 것 같아. 이것도 저것도 내 그림이 아닌 느낌이야." 그러자 엄마는 명쾌한 해답을 바로 주셨다. "미켈란젤로는 남을 위해서 그림을 그렸어. 자기 표식을 한 것은 오로지 피에타뿐이었지. 화가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사상이 바뀌면 그림 스타일도 변해, 평생 한 스타일로 그릴 수 없어. 카라바조는 그림을 아름답지만 끔찍하게 그려, 하지만 노년에는 그 생에 대한 회의감을 느꼈지. 화가의 그림들은 변해, 그림을 억지로 바꾸려 하지 마. 그림이 곧 너야." 엄마는 나의 길고 길었던 오랜 고민의 끝에 쉼표를 찍어주셨다.  


그 날 이후부터 나는 그림을 그리면서 '이 그림은 왜 그리는 걸까?'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어디에서부터 나의 생각이 그림과 연결이 되고 있는지, 왜 그러한 그림들을 그리고 싶은지 점점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그림에 대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 무게감은 기분 좋은 무거움이었다. 그림 스타일이 변하고, 남을 위해 그림을 그린다 하더라도 그 속에서 내가 진정으로 그리고 싶은 이유에 대하여 생각하기 시작하였고 그 순간부터 아주 느린 속도지만 내 안에서 그림 나무의 깊은 뿌리가 자라고 있는 느낌이었다.


여전히 느린 움직임 속에 이런저런 다양한 고민들을 하고 있지만, 그럴 때마다 엄마가 해준 따뜻한 응원이 나를 힘차게 앞으로 나가게 해 준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빠르게 흘러가는 유행보단 느리게 흘러가는 순간들이 좋아지고, 유명한 어떤 장면보다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은 장면들이 좋아진다. 현재 좋아하는 것에 충실히 그림을 그리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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