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
직원들은 모두 김반장이 회사를 운영하기 원했다. 그런데 한 가지 어려운 사정이 생겼다. 김반장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고 신원조차 분명히 밝히지 못했다. 김씨라 불리는 성조차도 확실하지 않았다. 본인의 은행 계좌가 없으므로 그동안 월급은 사장과 합의 하에 모두 현금으로 수령하였다고 한다. 입사할 때 근로계약서 작성은 물론 사원 등록도 하지 못했다. 한마디로 김반장은 유령 직원이었다. 이런 상태로는 대표이사 등록이 불가능했다. 직원들은 이와 같은 사실을 몰랐다. 김반장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공장을 어떻게든 돌려야 하고 그러려면 회사 운영의 모든 책임을 떠안을 대표가 존재해야 했다. 김반장은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현실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또 다른 문제는 직원들 중에 아무도 대표를 맡겠다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이전 임원들이 모두 사라진 상황에서 누구 하나 선뜻 경영의 책임을 떠안으려 하지 않았다. 부도의 문제가 해결되는가 싶더니 회사는 또 다른 문제에 봉착했다.
김반장은 이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 고민했다. 나는 아직 미성년자라 회사 대표직을 맡을 수가 없었다. 회사 내에서 찾지 못한다면 회사 밖에서라도 영입을 해야 했다. 그러나 이전 사장의 부도덕한 일도 있고 해서 우리 회사에서 일을 해본 경험도, 회사에 대한 애착도 없는 이를 사장 자리에 앉힐 수 없었다. 모두는 그것이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격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김반장의 머릿속에 다온 누나가 떠올랐다. 오랫동안 회사 직원들을 위해 식사를 제공하고 그들의 건강을 챙겨 온 기여도만으로도 한 식구로 영입할 충분한 사유가 되었다. 물론 경영 전반은 자신이 맡아서 하겠지만 법적인 빈자리를 누나가 채워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나는 김반장에게 누나가 실은 엔지니어 출신이라고 알려주었고 그는 그 말을 듣자마자 환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바로 누나의 가게로 달려갔다.
점심 손님 맞을 준비로 마침 큰 솥에 우거지를 한 움큼 넣고 있던 누나가 우리를 보자 반가워한다. 김반장과 우리 남매는 식탁에 둘러앉았다.
"다온양이 대기업 연구소에서 일한 적이 있다고 들었네. 우리 회사의 CTO 겸 대표이사직을 맡는 것이 어떤가?"
김반장은 음식 냄새가 깊게 배인 앞치마를 두른 시골 국밥집 아가씨에게 회사의 사장 자리를 제안했다. 물론 그간 벌어진 일과 자신의 처지, 그리고 사장 자리에 선뜻 나서는 지원자가 없다는 것도 설명했다. 누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 제안을 수락했다.
"민수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 할 수 있어요."
식당은 당분간 조립팀 권씨 아저씨 아내분이 맡아서 해 주시기로 했고 그날부터 다온 누나는 회사의 대표이사가 되었다. 누나와 김반장은 회사를 혁신하기로 결정했다. 연구소를 신설해 설계부서를 연구소에 편입시켰다. 품질팀을 별도로 운영하여 품질이 영업과 타협하지 못하도록 했다. 재무팀장을 CFO로 승진시켰고, 그동안 유명무실했던 총무와 인사팀을 분리, 강화했다. 김반장은 공장 업무 전반에 대한 관리 감독과 영업을 총괄하는 일을 맡았다. 하지만 김반장의 공식적인 직위는 없었고 여전히 시스템에는 올라가지 못했다. 경영 시스템을 꾸리고 나자 마지막으로 사명을 바꾸기로 했다. 이왕 새 판을 짜는 김에 제품과 고객을 다각화하고 베어링 전문 회사에서 고부가가치 정밀기계 솔루션 회사로 도약하는 마스터플랜을 세웠다.
태양처럼 강렬하게 떠오르는 기술기반의 회사라는 의미인 '솔텍(SolTech)'을 신규 사명으로 등록하고 PRM (Product Road Map)을 만들었다. 시장에 공개되어 있는 자료를 바탕으로 필요 기술을 분석하고 현재 보유하고 있는 기술과 장비로 생산 가능한 제품과 신규 투자가 필요한 제품을 분류했다. 이에 따라 일반 베어링에서 초고속 정밀베어링으로 제품 포트폴리오를 확대하고 정밀 로봇에 사용되는 감속기를 추가했다. 우리 제품이 필요한 고객사 리스트를 만들고 하나하나 찾아가서 대면 영업을 하기로 했다.
김반장의 학습능력은 대단했다. 이 모든 준비를 한 주도 안 되어 마무리했으며 새로 구매한 기계의 작동법을 하루 만에 습득했다. 그의 자료 분석 능력과 기억력은 나와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오랜 기간 체계적인 교육으로 길러진 공학도의 도움이 필요했고 다온 누나가 그 역할을 해 주었다. 누나의 눈빛은 국밥을 만들 때와는 확연히 달라졌다. 그녀는 대기업 연구소에서 직접 제품을 개발해 본 경험을 살려 개발 방향이 엇나가지 않게 조율해 주었다.
매출이 늘어나면서 신규 채용이 이어졌고 어느새 회사는 급성장의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고객의 주문을 감당하지 못해 2년 만에 회사 부지 바로 옆에 제2 공장을 신축했고 사무동 건물도 신식으로 리모델링했다. 이제는 예전의 어설프고 후줄근한 베어링 공장의 모습이 아니었다. 공장 마당에서 정문으로 이어지는 바닥과 문 밖 도로는 아스팔트로 단장되었고 트럭이 지나다닐 때 더 이상 먼지를 뒤집어쓰지 않아도 되었다. 사무동은 깔끔한 글라스룩으로 탈바꿈했으며 항상 직원들로 북적였다.
나는 이제 성인이 되었고 기술영업을 책임지는 위치에 올랐다.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부하직원들이 부장님이라고 호칭할 때는 어색하고 부끄럽기만 했다. 하지만 회사 내에서 이름을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그럭저럭 참아야 했다. 사무동 1층에는 널찍한 대회의실이 있다. 예전에는 탁자와 의자 몇 개뿐인 회의실 겸 식당으로 사용되던 곳에 각종 미디어 장비들과 대형 TV가 설치되어 있다. 계단을 올라가면 2층 사무직원들의 공간이 나온다. 이곳 역시 2년 전과 비교하면 환골탈태한 모습이다. 칙칙한 갈색 계열의 책상과 의자들이 어지럽던 과거에 비해 밝은 베이지색의 깔끔한 사무 가구들이 똑바로 정렬되어 있고, 파티션(Partition) 안에는 젊은 직원들이 깨끗한 회사 유니폼을 입고 열심히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다. 천장에는 LED 조명이 밝게 빛나고 있어 어두컴컴했던 과거 사무실에 비해 한참 넓어 보인다. '영업부' 팻말이 걸린 파티션 안쪽에 내 자라도 마련되어 있었다.
옆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외부에서 연결된 계단을 하나 더 올라가면 증축으로 만들어진 3층이 나온다. 여기는 사장실로 다온 누나가 쓰는 방이다. 누나는 김반장에게 그 방을 쓰게 하려 했으나 완강한 거절로 실패했다. 김반장은 자신은 생산동 가까이 있어야 한다며 공장 메인 게이트 옆에 자그마한 사무공간을 만들어서 쓰고 있었다. 사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방송국 사람들이 조명과 마이크를 설치하고 있다. 누나는 그 앞에서 PD와 몇 가지 사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 회사는 경이적인 성장으로 업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고 마침내 방송까지 타게 되었다.
다온 누나의 외모는 처음 만났을 때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검은 벙거지를 뒤집어쓰고 몸빼를 두른 시골 아낙이 정장 차림의 세련된 커리어워먼이 되었다. 진하지 않게 화장기가 도는 그녀의 얼굴은 쳐다보기 부끄러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 모습에 넋이 나가서 한 동안 멍하니 서있던 내게 누나가 오라고 손짓을 했다. 방송국 PD는 나와 그녀를 소파에 앉혔고 스타일리스트가 우리 얼굴에 마무리 터치를 했다. 그리고 곧 PD의 질문이 이어졌다.
"먼저 금다온 사장님께 질문드리겠습니다. 수출 1억 불 달성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젊은 여성분이 굴뚝산업이라 불리는 제조업 회사를 이끌어 간다는 게 흔한 광경은 아닌데 말이죠. 게다가 초고속 성장을 이뤄내셨습니다. 솔텍이 이렇게 빠르게 성장하게 된 동력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붉은 입가에 슬쩍 미소가 감돌았다. 누나는 담담하지만 자신에 찬 어조로 질문에 대답했다.
"저 혼자만의 성과가 아닙니다. 우리 회사에는 뛰어난 인재가 많습니다. 옆에 앉은 영업부장 같은 젊고 유능한 직원들이 함께 이룬 성과지요. 저희 솔텍은 전통적인 베어링 전문 회사에서 초정밀부품과 산업솔루션을 제공하는 진정한 B2B 회사로 거듭났습니다. 성장 동력은 기술 혁신과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하려는 자세가 아닌가 합니다. 오늘의 성과는 고객이 저희의 이러한 노력과 자세를 인정해 준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누나는 한 기업의 대표다운 답변으로 인터뷰를 무리 없이 이끌었다. 기업, 특히 제조업이라는 그 형태가 갖추어지기 시작한 때와 비교하여 현재는 외형과 본질에 많은 차이가 생겨났다. 산업혁명 덕택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해진 초기의 제조업은 노동 착취의 수단이었다. 자본가가 세운 공장에서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제품 다발이 쏟아져 나왔다. 기업의 목적인 이윤 추구를 위해서 노동의 값을 싸게 매겨야만 했다. 노동 집약적 구조에서 육체적으로 착취당하던 노동자들은 제조업의 본질이 기술로 옮겨가면서 또 다른 형태의 착취 속으로 뛰어들었다. 무한 경쟁과 성과 중심의 구조 안에서 노동자들은 정신과 영혼을 혹사시켰다. 육체의 고통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머리와 가슴이 썩고 인간성을 잃어가게 만드는 한 차원 높은 고통을 동반한 노동이었다. 그런데 제조업의 외형과 본질이 변하고 난 지금 시장에서 살아남는 기업은 적어도 직원들에게 고통을 주는 기업은 아니었다. 창의성이 무엇보다 중요해진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직원이 행복해야 했다. 또한 기업이 나아갈 방향을 설정할 경영진의 판단력이 어느 때 보다 중요했다. 누나는 이 점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방송국 PD와의 인터뷰가 끝나고 손님들을 모두 배웅한 후 누나는 김반장을 찾아갔다. 김반장은 새로 출시 예정인 제품의 설계도를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었다. 온갖 주름과 흉터로 얼룩진 검고 어두운 얼굴에서 유일하게 빛이 나는 그의 두 눈은 도면 구석구석을 훑고 있었다. 뒤늦게 누나와 나를 발견한 김반장은 우리에게 앉기를 권했다. 누나는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이제 우리도 큰 일을 하나 시작해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