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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가 느린 이유

기하학적 상사, 운동학적 상사, 역학적 상사

by Neutron

아주 오래전에 내가 재미있게 봤던 드라마가 있었다. MBC 대하드라마 임진왜란이었다. 성웅 이순신 장군께서 여러 해전을 승리로 이끌고 나라를 구하는 영웅적 서사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각본과 배우, 특히 김무생 배우의 이순신 장군 연기는 완벽했다. 그러나 옥에 티가 있었는데, 그것은 해전 씬이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CG가 발달되어 실사와 거의 유사하게 묘사되는 바다와 전함들의 모습을 영상에 담을 수 있는 시절은 아니었다. 연출자는 그 시절 동원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영상을 제작하려 했을 것이다. 정교하게 제작된 미니어처 판옥선과 거북선은 장인의 숨을 불어넣어 가며 만든 거의 실제 모습과 똑같은 예술작품이었다.


문제는 그 움직임의 부자연스러움이었다. 예상하건대, 대형 수조에 물을 받아 놓고 작은 모형 전함들을 띄우고 누군가가 물을 찰싹찰쌀 치며 파도를 만들었던 것 같다. 그 장면을 클로즈업하여 찍으면 마치 거대한 바다에 전함들이 빼곡히 들어찬 모습을 영상으로 재현할 수 있을 거라 여겼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영상은 대실패였다. 제작진이 상사법칙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바닷물은 너무 찰랑거렸고, 그 위를 떠 다니는 전함들의 움직임은 너무 촐싹거렸다. 사람이 만든 수조의 물과 미니어처라는 것이 금방 드러나는 영상이었다. 실제 크기의 파도와 배들이 그렇게 빨리 움직일 수 있을까? 그 영상은 기하학적 상사만 적용하고 운동학적 상사는 무시해 버린 아마추어 같은 편집이었다. 만약 내가 연출자였다면 그 해전씬만 느리게 재생하였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기하학적 상사와 운동학적 상사가 모두 이루어진 완벽한 영상이 만들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기하학적 상사(Geometry Similarity)란 닮은 꼴을 말한다. 3차원 직육면체가 있다고 할 때 각 변의 길이기 a 배씩 증가하면 그 표면적은 a² 배만큼 늘어나고 그 부피와 무게는 a³ 배만큼 늘어난다. 기하학적 상사란 모든 치수가 동일한 배수만큼 변하는 것이다.


운동학적 상사(Kinematic Similarity)란 치수가 변하는 만큼 시간 스케일도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해전 씬으로 돌아가서 실제 바다에서 파도의 높이가 1m라고 가정해 보자. 그 치수 스케일을 1/10으로 줄인 수조와 미니어처에서는 파도의 높이가 10cm가 된다. 파도가 솟았다가 내려오는 원인은 중력이고 1m의 파도가 내려오는 시간과 10cm의 파도가 내려오는 시간은 분명 다르다. 시청자들이 중력에 의해 움직이는 실제 바다의 파도를 상상하게 하려면 수조 내 파도의 움직임을 느리게 해야 한다.


또한, 역학적 상사(Dynamic Similarity)라는 것도 있다. 동물원을 가보면 코끼리의 움직임과 원숭이의 움직임은 많은 차이가 있다. 코끼리는 마치 슬로모션인 것처럼 걷는다. 반면에 원숭이들은 매우 날래고 잽싸게 여기저기를 뛰어다닌다. 코끼리와 원숭이의 뼈와 근육 조직은 큰 차이가 없다. 단지 코끼리가 더 큰 뼈와 근육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어떤 힘을 받을 때 뼈와 근육이 견딜 수 있는지 없는 지를 판단하려면 그곳에 작용하는 응력을 봐야 한다. 응력이란 단위 면적에 작용하는 힘을 말한다. 압력과 같은 단위로 표현된다.


코끼리는 원숭이보다 더 큰 뼈와 근육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 큰 힘을 견딜 수 있다. 만약 원숭이가 코끼리만큼의 체중을 가진다면 서 있지도 못할 것이고 곧 뼈가 부러지고 근육이 파열될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코끼리의 체중은 큰 부피에 작용하므로 그 체중을 코끼리의 뼈와 근육의 크기만큼으로 나누면 작용하는 응력은 원숭이의 뼈와 근육에 작용하는 응력과 큰 차이가 없게 된다.


코끼리가 원숭이보다 느리게 움직이는 이유는 이 역학적 상사를 만족해야 하기 때문이다. 뼈와 근육에 원숭이와 동일한 응력이 걸릴 수 있도록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코끼리가 원숭이와 같은 속도로 뛰거나 움직인다면 그 뼈와 근육에 걸리는 응력은 크게 증가할 것이고 이번에는 코끼리의 뼈가 부러지고 근육이 파열될 것이다. 만약 원숭이가 코끼리만큼 커진다면 그 움직임은 매우 느려져야 한다. 그래야 원숭이도 무사할 수 있다. 영화에서 거대한 킹콩의 움직임이 슬로모션인 것처럼 보이는 이유에는 역학적 상사의 영향도 있다.


상사법칙은 모형실험을 할 때 많이 쓰인다. 자동차나 비행기처럼 크고 비싼 제품을 실제 크기로 만들어서 실험하면 그 비용이 많이 든다. 그래서 장난감처럼 작지만 실제 제품과 정확히 닮은 모형으로 실험을 하곤 한다. 비행기는 풍동 실험이라는 것을 통해 개발되는데 실제 비행기가 날아가면서 받는 공기의 저항과 비행에 미치는 영향 등을 값싸게 시뮬레이션할 수 있다. 이때 역학적 상사법칙이 적용되면 실제 크기의 비행기가 받는 바람의 속도보다 훨씬 빠른 속도를 풍동에 주어야 한다. 그래야 동일 조건에서 실제 사이즈의 비행기가 받는 영향을 재현할 수 있다.


이제 상사법칙을 이해하였으니, 앞으로 영화나 드라마를 제작하고자 하는 분이 있다면 이 상사법칙을 꼭 지켜주십사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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