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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과 희망 사이

민주주의 파괴자와 수호자

by Neutron

2024년 12월 3일 밤 11시경 대한민국의 시민은 비상계엄에 의해 동원된 장갑차 앞에 드러누웠다. 국회 출입문을 봉쇄한 군경을 밀치고 국회의원들의 등원을 도왔다. 국회 본회의장으로 진입하려는 특공대 앞을 가로막고 서서 이게 무슨 짓이냐며 호통을 쳤다.


참 겁도 없다. 아니, 겁이 많이 났을 거다. 계엄 포고령을 듣자마자 국회 앞으로 달려갔던 한 시민은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고 죽은 뒤 시신이라도 발견되기 쉽게 SNS에 '국회로 간다' 한 문장을 남겼다고 한다. 이런 시민들의 무모함 덕에 국회에 투입된 군대의 행동이 소극적으로 변했고 정족수를 채운 국회 본회의장에서 계엄 해제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대통령은 실패한 친위 쿠데타에 이어 2차 계엄을 시도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미 대통령에 등을 돌린 군대로 인해 그 망상은 산산이 부서졌다.


시민들은 민주주의의 후퇴가 자신의 죽음보다 더 두려웠을 것이다. 자식들과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내 자식들과 가족이 그 암울했던 독재의 80년대를 다시 살가가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공포가 밀려왔을 것이다. 우리는 많은 피를 흘려 힘들게 민주주의를 쟁취했다. 수많은 우리 청년들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희생되었다. 그들의 희생 위에 우리는 주권을 행사하며 살고 있고, 이제 민주주의는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공기와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그 시스템을 파괴하려 했던 대통령을 탄핵하라고 명령하였다. 하지만 민주 시스템 파괴 세력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다. 일부 우매한 개신교 세력은 사이비 목사의 말에 선동되어 탄핵 추진 시민들을 빨갱이로 몰았다. 다수 여당 국회의원들은 내란범을 감싸고돌았다. 사이비 목사는 집회 때마다 돈을 벌었으며, 여당 의원들은 이런 부류의 사람들의 표가 절실히 필요했다. 국회는 여러 차례의 시도 끝에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통과시켰다. 시민들의 압박에 못 이긴 여당 의원 일부가 탄핵 가결에 표를 던진 것이다.


내란을 일으킨 대통령은 헌정 사상 최초로 현직 구속되었다. 시민들은 환호하였지만 그 기쁨도 잠시일 뿐 판사와 검사가 법기술을 부려 구속된 피의자를 석방시켰다. 우리는 이때부터 뭔가 잘못되어 간다고 느꼈다. 내란에 동조했던 군 수뇌부는 모두 구속되었는데, 그 우두머리는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게 되었다. 사법 정의가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땅에 희망은 없어 보였다.


언론은 헌법재판소로 넘어간 탄핵 판결이 기각될 수도 있다고 떠들어댔다. 그 의미는 아주 중대했다. 내란 우두머리에게 비상계엄 면허증을 주는 것이다. 아무 때나 계엄령을 선포하고 시민을 억압하려 군대를 동원해도 그를 막을 법적 근거가 없어지는 것이다. 이 나라는 영구 독재의 시대로 들어갈 것이며 이 땅에 더 이상 민주주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문화 콘텐츠는 검열을 거칠 것이며, 출판과 언론의 자유도 빼앗길 것이다. 정권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은 체포되고 구금될 것이고 세계는 더 이상 대한민국을 민주주의 국가로 분류하지 않을 것이다.


시민들은 그 두려움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목숨을 건 결기로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앉아서 대통령 탄핵과 재구속을 외쳤다. 시민들이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광장에 쏟아져 나온 백만의 인파는 서로를 의지하며 겨울의 찬 바람을 견뎠다. 폭설이 내리는 겨울밤 청년들은 은색 비닐을 뒤집어쓰고 버텼다. 헌법에 근거한 법리로만 따지면 대통령의 탄핵은 분명했다. 그러나 일개 판사와 검찰의 농단으로 석방된 대통령을 보고 이미 미쳐 돌아가고 있는 이 나라를 보았다. 그것이 헌재의 판결을 확신할 수 없는 이유였다.


100일이 넘는 긴 시간 동안 탄핵을 외치며 광장을 지켰던 시민들은 극도로 긴장된 마음으로 헌재의 판결을 보고 있었다. 자유롭게 내 생각을 표현하며 살아갈 수 있는 나라로 나아갈 것인가, 무력에 의해 억압된 암흑의 시대로 돌아갈 것인가. 모두는 역사적 갈림길 위에 서 있었다.


마침내, 대통령을 파면한다는 주문이 읽혔다. 헌재의 판결문은 내란범의 모든 변명을 일축했다. 야당이 정부 예산 반대 및 검찰 활동비 삭감 등 다수의 위력을 휘둘러 국정을 마비시킨 이유로 계엄을 선포하였다고 변명했지만 헌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야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대통령의 국정 운영 실패에 의한 결과였고, 그 또한 국민의 의지이며 목소리였다고 반박하였다. 그래서 군대를 동원하여 국회를 무력화시키려 했던 것은 국민을 상대로 군대를 동원한 것과 같은 의미였다고 설명하였다. 피청구인 대통령은 작위적으로 비상권을 발동하여 군과 국민이 대치하는 상황을 초래하였으며 이는 국민 주권을 훼손한 중대한 국민 배반 행위에 해당한다고 밝히며 주문을 읽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정말 다행히도 지켜지는 순간이었다.


내란 우두머리는 정부 각 요직에 자신의 심복들을 심어 놓았다. 국무총리, 국방부 장관, 행안부 장관, 법무부 장관, 방송통신위원장 등등... 그들의 공통점은 맡은 직무를 수행할 능력이 없고 대통령의 말을 하늘처럼 받든다는 것이다. 대통령 취임 이후 한국 경제는 무너져 내렸으며 외교는 비상식적이었다. 특히 일본을 향한 굴욕외교는 일제 식민 치하를 연상케 했다. 전 세계가 위험성을 지적한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가 안전하다고 한국 정부가 대신 홍보를 해 주었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동의를 받지 않고 그들의 노동을 착취했던 전범기업에 면죄부를 주었다. 이는 극우의 행태가 아니다. 극우는 민족주의에 따라 타민족을 배척하고 우리 민족의 이익만을 위해 필요시 폭력을 동원한다. 이 정부를 지지하며 법원 테러를 저지른 사람들을 극우라 부르는 언론은 극우의 뜻이 무엇인지부터 알고 와라. 이 정부와 지지자들이 보인 행태는 극우가 아니라 매국이다.


30%, 딱 이만큼이 우리 속에 있는 비상식이다. 이는 국회의 여당 인원 비율과 거의 동일하다. 미안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상식을 갈망하는 비율도 딱 30% 정도다. 나머지 40%는 자칭 중도라고 불리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건 그들의 희망일 뿐이고, 실은 아무 생각 없이 세상을 표류하는 방관자들이다. 정치를 혐오하고 정치에 무관심한 것이 고귀한 것인 양 착각하는 겁쟁이들이다. 나도 그러한 부류였다. 그대들의 무관심을 뒤로하고 상식을 세우려는 사람들이 피 흘려 이룬 대한민국이고 민주주의다. 가만히 앉아서 그 열매를 누리는 것에, 마음에 안 드는 정치권력을 술안주로 씹어도 잡혀가지 않는 환경을 만들어 준 그들에게 최소한 감사한 줄은 알자.


이번에 역사적으로 중대한 사건을 겪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민주주의에서 내 한 표가 어떤 무게감을 갖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이전 정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깜도 안 되는 위험한 사람에게 권력을 맡긴 결과가 어떠한지, 그 사태를 수습하는 데 얼마나 큰 사회적 에너지가 소모되어야 하는지 모두 보고 느꼈다. 우리의 현실인 30%의 비상식과 40%의 무관심이 만들어 낸 결과들은 그 누구의 탓도 아니다. 오롯이 우리의 탓이다. 이 70% 때문에 우리는 언제든지 비상식적 선택을 할 위험에 처해 있다. 지금껏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국민투표에 의해 선출된 제 2, 제 3의 독재자가 나타나 정치적 이유로 비상계엄을 선포할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다. 이 수치로만 보면 이 나라 민주주의의 미래는 절망적이다.


그러나 그 절망 속에서 나는 희망을 보았다. 어린 청년들이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몸소 깨달은 것이다. 내가 행사하는 한 표가 얼마나 엄중한지 나라의 운명을 뒤바꿀 만큼 얼마나 중요한지 느낀 것이다. 부디 청년들이 많은 깨달음을 얻었으면 좋겠다.


또한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잘 작동하고 있는 민주주의 시스템이 있었다. 지귀연 같은 기회주위적이고 비상식적인 판사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대한민국의 사법부는 아직 망가지지 않았다. 특히 이번 헌재의 권한대행이었고 대통령 파면의 주문을 낭독했던 문형배 재판관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문형배 재판관은 매우 가난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김장하 선생이라는 독지가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는 학업을 마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그에게 도움을 주었던 김장하 선생의 말씀을 항상 잊지 않았다.


"나의 도움이라 생각하지 말아라. 사회가 너를 도운 것이고, 네가 갚아야 할 대상은 사회다."


헌법재판관 후보로 인사청문회에 나온 문형배 재판관은 본의 아니게 질의를 하는 국회의원들로부터 찬사를 받아야 했다.


"헌법재판관 평균 재산이 20억인데, 문 후보자께서 신고한 재산은 6억 7천만 원이네요. 27년간 판사 생활을 하면서 모은 재산치고는 너무 적은 것 아닌가요?"


"제가 결혼하면서 결심한 게 하나 있습니다. 우리나라 국민의 평균 재산만큼만 가지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찾아보니 국민들의 평균 재산이 한 3억 정도 되는데, 제 재산이 4억 조금 넘으니까 평균보다 조금 더 많습니다. 이 부분은 죄송합니다."


"재산은 6억 7천만 원 신고하셨는데요."


"그 나머지는 아버지의 재산입니다."


"직계 존속 재산도 포함해서 신고하신 거군요."


"네."


"제가 지금까지 봐온 법관 중 가장 청렴하신 분입니다. 존경합니다."


"부끄럽습니다."


문형배 헌법재판관은 8인 재판관 모두의 의견을 하나로 수렴하여 만장일치 판결로 내란 우두머리를 대통령직에서 파면하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지켜내었다. 그가 도움을 받았던 사회에 보답한 것이다.


김장하 선생과 같은 독지가와 그의 참 뜻을 마음속 깊이 새겼던 문형배 재판관과 같은 법관이 이 사회에 있는 한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물론 가장 큰 희망은 광장으로 뛰쳐나온 시민들이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헌재도 내란세력의 무시무시한 압박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눈에 보이지 않는 선행으로 사회를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누군가가 있고, 양심과 상식에 따라 시회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는 많은 시민들이 있다. 거짓 선동을 통해 돈벌이를 하고 민주주의를 망가뜨리는 일부 사이비 목사와 비판 없이 그를 추종하는 우매한 광신도들은 사회가 상식적으로 변하면 자연히 도태되게 마련이다. 양심과 상식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반드시 만들어지리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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