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 #무주택자 #가난 #중산층 #돈
부자 되세요~.
새해 덕담으로 주고받는 인사다.
우리 부부 둘 다 공무원이었으니 매달 들어오는 월급이야 뻔하다. 갑자기 부자가 되려면 복권 당첨을 노려야 하나? 그것 말고는 부정수수나 청탁 등 죄질 나쁜 일을 저지를 수밖에 없다. 그랬다가는 유치장 들어가는 신세가 될 테고.
아니면 더 아끼고 절약해서 돈을 모으라는 뜻인가? 씀씀이도 습관이라고 한다. 이 날까지 몇십 년 동안 몸에 밴 것을 고치려면 그만한 고통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근검절약은 아니지만 사치하지는 않다고 본다. 이 나이에 무엇을 위하여? 더 아끼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그냥 살던 대로 살아가련다.
나는 집 한 채 없는 무주택자다.
“에이~ 농담 마세요.” 나이 60살이 넘도록 집 한 채도 없다고 하면 다들 의아해한다. "숨겨놓은 금싸라기 땅이 있는 거 아녀?" 묻는다. 또는 "서울 어디 똘똘한 아파트 한 채 꿍쳐 놓았겠지요." 한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남편도 평생 교직생활한 맞벌이 교사부부니 남들은 ‘준재벌급’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집이 없다고?
아예 집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 때는 44평 아파트에서 식구 4명이 각자 방 하나씩 차지하고 떵떵거리고(?) 살았다. 그러다가 아이들이 커서 하나둘 집을 떠나자 썰렁하니 휑하기만 했다. 집이 넓다고 해도 우리 부부가 쓰는 공간은 안방과 거실뿐이다. 10년 살았건만 낯설기만 하다. 빈 방인걸 뻔히 알면서도 문열어보고는 “아무도 없네~” 중얼거린다. 집에 들어가면 몸도 마음도 추워 웅크리게 된다. 집은 사람 체온으로 덥혀진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일단 작은 평수로 집을 줄이자. 마땅한 집이 나올 때까지만 전세로 옮겨 앉자 싶었다. 전원주택에 살아보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아서 잠시 휴직기를 둔다는 것이 이렇게 무주택자로 전락(?)하게 된 계기다.
누가 가난이 부끄럽지 않다 했는가
어느 날 비좁은 우리 집 마당에 트럭이 들어섰다. 그리고 들이닥친 인부들이 신발도 벗지 않은 채 안방으로 들어가 장롱을 끌어냈다. 감히 중학교 2학년 계집아이가 가로막고 나설 수가 없었다. 겁에 질려 서 있는 나를 보고 우리 집이 돈을 갚지 않아 대신 장롱을 가져간다는 거다. 순간, 무서움이 부끄러움으로 바뀌었다. “무슨 일이여?” 동네 사람들이 한둘씩 구경삼아 모여들 때 나는 2층 다락방으로 숨었다.
트럭에 실려가는 자개농이 햇빛 받아 반사된 빛이 창 틈으로 엿보는 내 눈을 찌르는 듯했다. 그때만큼 죽도록 부끄럽고 창피했던 적은 없다. 가난 때문만은 아니다. 가난하면서 자개농을 놓고 살았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때 다짐했다. 굶어 죽어도 남들에게 손내밀 거나 돈을 꾸지 않겠노라. 절대로!
어쩜, 나를 키운 건 가난인지 모른다. 지지리 궁상이랄까 봐 가난에 대한 경험담을 더 언급하지 않겠지만 가난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악착같이 공부했을까? 지금까지 치열하게 살았을까? 그놈의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나에게 신분상승이란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돈에 한이 맺혔을 법도 하지 않은가
그런데 큰돈을 모으지 못했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나? 나도 이상하다. 그렇다고 씀씀이가 헤프거나 사치스러운 것도 아니다. 아이들 키우며 비싼 학원을 보낸 것도 아니고, 서울 소재 대학을 보낸 것도 아니다. 남은 거라면 대학까지 졸업했고 결혼하여 독립한 두 아이가 전부다. 요즘 한 아이를 낳아 대학까지 키우는데 대략 3억 정도 돈이 든다고 한다. 두 아이 키워 결혼까지 시켰으니 도합 6억이라는 확실한 사용처만 있을 뿐이다.
'잘 산다, 못 산다' 판단 기준은 가난한 내 어린 시절이다.
바빠서 깜빡한 적은 있지만 돈이 없어서 아이들 학교 준비물을 못 챙겨준 적은 없다. “뭐 해 먹지?”가 고민이지 먹을 게 없어 밥때를 걱정하지는 않았다. 한 마디로 지금은 먹고살만해졌다는 이야기인 셈이다. 욕심부리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그때보다 잘 살면 됐지. 안 그래?" 지금 누리는 이 풍요로움(?)에 감사해야지. 더 욕심내면 벌 받지. 벌.
그럼 됐어. 뭘 더 바래.
나라마다 중산층 기준이 제각각이다.
우선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부채 없는 30평 아파트, 월 500만 원 이상 급여, 2,000CC급 중형차 보유, 1억 원 이상 예금, 연 1회 이상 해외여행을 다녀올 수 있는 경제적 여유가 있어야 한단다. 프랑스는 1개 이상의 외국어와 악기 연주, 직접 즐기는 스포츠, 색다른 요리, 사회적 분노에 대한 공감능력, 약자를 돕는 봉사활동이라고 한다. 영국의 경우는 페어플레이, 자신의 주장과 신념, 독선적 행동 안 할 것, 약자 보호, 강자에 대한 대응, 불의, 불평, 불법에 맞서서 싸울 용기가 있어야 한단다.
나라마다 중산층을 보는 관점 자체가 확연히 다르다. 우리나라는 돈. 돈이다. 일단 나는 한국 사람이니 우리나라 기준으로 볼 때 무주택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중산층 자격 미달자다. 나와 남편은 우리나라 중산층 대열에 끼려고 치열하게 노력하지 않은 건 분명하다. 한 푼이라도 더 모으려고 아등바등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정작 본인인 '나는 가난하지 않다' 버틴다. 그러니 국적없는 '제3국의 중산층'이라 할 수밖에.
집이 없지 집에 대한 소망조차 없는 것은 아니다.
푸릇푸릇 잔디밭이 깔려있는 전원주택은 아니더라도 밖이 내다보이는 커다란 창이 있으면 좋겠다. 그 아래 의자를 끌어다 놓고 차를 마시고, 책도 읽고 싶은 로망이 왜 없으랴. 그게 아니라면 집과 밖이 통하는 테라스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테라스! 테라스!" 노래하다시피 했더니 남편이 안방 베란다에 원목마루를 깔고 캠핑용 접이식 의자 2개를 놓아주었다.
가끔은 여기 테라스, 아니 베란다에 앉아 음악 들으며 커피를 마신다. 창밖으로 보이는 경치라고 해 봤자 떡하니, 버티고 선 앞 동 건물과 주차장 출입구가 전부다. 차가 몇 대 들어오는지 헤아리거나 수시로 들락거리는 택배차를 구경하는 것이 고작이다. 그래도 비 오는 날, 여기 앉아 창밖을 내다보며 비멍을 때리는 맛이 괜찮다. 나름 숨 쉴 공간이 있어 좋다.
무주택자로 살면서 왜 고민이 없겠는가?
남편은 이사 다니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한다. 어느 날 길거리로 나앉을지 모른다고 불안해한다. 나 또한 집값이 올랐다, 부동산이 꿈틀거린다, 전세사기다 하는 뉴스만 들어도 오금이 저린다. 하지만 집에 얽매이고 싶지 않다. 퇴직 이후 좀 더 자유롭고 싶어서 버틴다.
집뿐만이 아니다. 15년 넘게 키우던 시츄 '뭉이'가 무지개다리를 건너자 더 이상 애완견을 키우지 않기로 했다. 우리보다 강아지가 오래 살면 끝까지 돌봐주지도 못할뿐더러 혼자 집에 두고 여행을 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 때맞추어 물 주고 환기시켜 주어야 하는 화분도 더 이상 키우지 말자 했다.
집 없이 사는 것에도 용기가 필요한가 보다
"그래도 집 한 채는 있어야지. 안 그래?" 자꾸만 주변 사람들이 한 마디씩 훈수를 둔다. 이 나이에 집 한 채 없다는 게 남들 눈에는 정상으로 보이지 않나 보다. 욜로족(?)으로 살아보자 싶다가도 '이 나이에 무능한 단적인 증거로 창피한 것 아닌가?’ 슬며시 의기소침해지기도 한다. 집 없이 사는 것도 '당당해질 용기'가 필요한가 보다.
요즘 황창연 신부님 강의를 즐겨 듣는다. 그분 말씀하시기를 집을 팔아서라도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것 다 해보고 후회없이 살란다. 그리고 장례비용으로 500만 원 정도만 남기라 한다. 100% 공감이다. 그렇다면 내 나이 60이 훌쩍 지난 지금, 있던 집도 팔아서 써야 할 판이다. 그런데 굳이 집을 장만해야 하나? 버텨볼 참이다.
“돈이 사람을 따라야지. 사람이 돈을 쫓아가면 추해지는 법여~.” 어린 삼 남매를 징글징글 고생시킨 우리 엄마의 명언이다. 그러고 보면 추하게 살지는 않은 듯하다. 오히려 주식이다, 코인이다, 부동산 갭투자에 덤벼들어 큰돈 벌기는 고사하고 사기 안 당하고 살았으니 다행이다.
“내가 말야. 집이 없지, 돈이 없냐?”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큰소리치며 허세 부려 본다.
가오만 있으면 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