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안내양 #전주 #아르바이트 #과거 #돌아보기
나이 탓이지? 나이 탓.
자꾸만 뒤돌아보게 되는 것은 나이 탓일 거야. 한 생을 돌아 환갑을 맞이하자 지나온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주욱~ 펼쳐진다. 60년 넘게 살아온 날들이 물 흘러가듯 무던하게 잘 살아왔네 싶다.
어, 잠깐만! 그 시간 속에 멈칫, 뒤돌아보게 하는 순간이 있다. 참나무 옹이 진 자리처럼 모질게 아픈 기억이 또렷하니 선명하다.
입술 끝 앙다물고 버티고 있는 '어린 영임'이가 그랬고, 혹독한 추위에 떨고 서 있는 '스무 살 영임'이가 그렇다. "남들도 다 그래. 너만 힘들었던 게 아니야."
괜찮아, 몇 마디로 위로되지 않는….
잘 있었을까?
오늘은 '스무 살 영임'이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40년이 훌쩍 지나서야 나선 길이지만 설렘만은 아니다. 그렇다고 마음의 각오를 해야 하는 것도 아닌 참, 미묘하고도 복잡한 감정이다. 책을 읽겠다고 펼쳐 들었지만 활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버스 창밖 저 멀리 들판에 아지랑이 보듯 아른아른 많은 생각들이 피어오른다.
버스가 전주 시내로 진입하면서부터 차창에 바짝 붙어 뭐, 하나라도 단서를 찾으려는 듯 길 좌우를 살피고, 상가 간판도 흩어보고, 높직한 건물도 올려다본다. 눈부시게 발전했다기보다는 지나온 세월만큼 고즈넉한 분위기다. 드디어 버스는 시외버스 터미널 하차장으로 들어선다.
전주.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낯선 도시였다.
대학교 1학년 겨울방학. ‘걱정 말아요.’ 집에는 쪽지 한 장 딸랑 남기고 전주행 버스를 탔다. 굳이 전라도 전주를 선택한 이유는 오로지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짐작 때문이다. 버스 문짝 두드리며 “오라이~!” 외쳐도 나를 알아볼 사람이 없어야 한다.
"버스 안내양? 차장을 하겠다고?" 식구들이 펄쩍 뛰었다. 그러면서도 “놔둬. 저러다 말겠지.” 그랬다. 그런데 기어코 석 달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겠다고 전주로 내려온 것이다. 어찌 보면 징글징글하게 속 썩이는 딸년이었다.
1982년 겨울. 지독히 추운 날들이다.
꽁꽁 언 손을 호~호~ 불어가며 밀걸레 빨아 차 바닥을 닦아야 했지. 정말 더럽게 운 없는 날은 “웩! 웩!” 구역질 참아가며 승객들 차멀미 토사물을 치워야 했지. 설날전후엔 귀성객들로 버스 통로까지 꽉 차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없다. 힘껏 밀어 버스 문을 닫고 창문을 넘어 안으로 들어갈 정도였지.
배차 시간에 쫓겨 시간이 없을 때는 비빔밥만 한 메뉴가 없다. 휘리릭~, 비벼서 몇 숟가락으로 욱여넣다시피 했던 그 전주비빔밥은 왜 그리 맛있던지. 지금 아무리 유명하다는 맛집을 찾아 먹어봐도 그때 그 맛은 절대 아니다. 그나마도 시간이 여의치 않아 밥때를 놓쳤을 땐 잠시 정차하는 동안 베지밀 한 병으로 때워야 했지. 춥기는 또 왜 그리 오지게 춥던지. 홑겹 치마차림 유니폼으로 견뎌내기란…. 허허벌판에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버스로 온 전라도 일대를 누빈다.
전주를 중심으로 인근에 있는 이리, 군산 그리고 '무진장 간다'는 무주, 진안, 장수를 들어갔다가 나온다. 어떤 날은 서해로 달려 정읍, 해리로 해서 김제, 부안, 곰소, 격포까지…. 멀리로는 경상도 함양까지 가는 날도 있다. 뉴스에서 '폭설주의보'가 내렸다고 아무리 시끄러워도 배차받은 목적지까지는 기어코 가야 한다. 태어나서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낯선 지명들뿐이다.
막차 닿은 곳이 그날 머무는 곳이다. 그러니 날마다 잠자리가 바뀌는 셈이다. 그날 나처럼 막차로 들어온 다른 버스 안내양과 허름한 숙소 방에서 하룻밤 같이 잠을 자야 한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해 뜨기도 전에 첫차로 그곳을 벗어난다. 스무 살 영임이는 거리에서 거리로, 도시에서 도시로 떠돌아다닌 셈이다.
전주를 떠나던 마지막 밤
드디어 떠나기로 정해둔 날이 되었다. 2학년 개학을 며칠 앞두고 목표했던 3개월을 꽉 채운 것이다. 그 안에서도 정든 동기들이 있어 그들과 소곤소곤 밤새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넌 좋겠네~” 떠나는 나를 부러워했다. 하지만 "우리 언제 한번 다시 만날까?" 누구도 제안하지 않는다.
그 밤, 우린 함께 껴안고 울었다. 서러움에 복받치듯 울었다. 왜 안 그럴까? 전주 숙소 같은 경우는 공용목욕탕을 써야 했고, 큰 방 하나에 다 같이 잠을 자야 하기 때문에 선임들 텃세가 여간 아니다. 수시로 들락거려 찬바람 드는 문 옆은 입사한 지 얼마 안 되는 신입들 차지로 혹시나 선배들 심기 건드릴라, 늘 긴장모드였다. 뿐인가 제대로 일 못 한다고 버스기사님들 구박은 또 얼마나 심하던지.
그때 누군가 불러준 노래가 조용필의 <친구>였다.
옛일 생각이 날 때마다 우리 잃어버린 정 찾아 친구여~
꿈속에서 만날까, 조용히 눈을 감네~
피곤에 지친 우리는 노래가 다 끝나기도 전에 잠이 들었다. 그리고 새벽이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마지막 인사도 없이 첫차 시간에 맞추어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그게 우리의 끝이었다.
평생 버스 안내양 할래?
묻는다면 '차라리 죽어버리겠다' 말할지 모른다. 누구는 경험 삼아 한번 해보자는 아르바이트였지만 누구는 가족 생계를 위해 그 안에서 청춘을 보내야 한다. 그런 친구들을 떠올린다면 “나는 돌아갈 대학이 있어. 그러니까 버티는 거야.” 이런 내가 얼마나 가당치 않고, 치기 어린 놀이로 보였겠는가 말이다.
그들은 나와의 헤어짐이 아쉬워서 울었을까? 아니면 술주정뱅이 아버지, 매달 병원비에 약값을 보내야 하는 아픈 엄마, 줄줄이 매달린 동생들 때문에 울지 않았을까? 무엇보다 겨우 중학교 마치고, 이곳에 들어와 떠날 수도 없는 자기 자신의 서러운 삶 때문에 울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들에게 미안했다. 죽도록 미안했다.
내 취업 신청서에 기재한 학력은 고졸
한마디로 '위장취업'인 것이다. 전주에서 돌아와 대학교 2학년 다니던 그즈음 대학생들이 구속되는 뉴스를 종종 보게 되었다. 학생 신분을 속이고 젊은 이들이 일하는 방직공장 등에 생산직으로 위장 취업해서 노동운동을 했다는 이유였다. 나는 전혀 그런 의도는 아니었지만 까딱, 했으면 '노동운동가 노영임'이 될 뻔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대학교 졸업하기 전까지 '3순이'를 꼭 해보고 싶었다. 식모라고 불리는 식순이, 차장인 차순이, 공장에서 일하는 공순이. 다음 방학에는 공장에 들어가서 공순이까지 해보려 했지만 거기서 그쳐야 했다.
솔직히 전력이 또 하나 있다. 고등학교 3학년, 대학 수능시험을 치르고 나서 식모살이하러 서울로 상경한 것이다. 요즘 말하는 '가사 도우미'다. 그때도 나 때문에 집안이 발칵 뒤집혔지. 어른들 말대로 정말 세상 무서운 줄 몰랐던 거다. 한 달 동안 남의 집살이 하며 지지리 고생하고도 월급 한 푼 못 받고 돌아왔지만 '가사도우미 유경력자'인 셈이다.
누가 시키길 했나? 대단한 신념이 있길 했나? 그런 것도 없다. 분명한 건 단지 돈벌이 때문만은 아니라는 거다. “나도 엄마처럼 경험해 볼까?” 만약 내 딸이 나처럼 집을 나가겠다면 아마도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놓겠다고 펄펄 뛸 것이다. 그런데 나는 스무 살 영임이에게 왜 그렇게까지 모질게 했을까….
꼭 그렇게까지 해야 했니?
터미널 대합실 들어서자 지난날들이 눈에 삼삼하다.
베지밀을 팔던 매점 자리는 편의점이 들어섰고, 비빔밥 먹던 식당은 ‘김밥천국’이 자리하고 있다. 터미널 대합실 안은 오고 가는 승객과 서너 명씩 담소 나누는 운전기사들, 청소하는 종사자들로 다소 번잡했지만 “오라이~” 외치던 감색 유니폼 버스 안내양들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녀들은 다 어디로 떠났을까? 하긴 ‘버스 안내양’이란 직업조차 없어진 세상이니….
그녀가 두 손 호! 호! 불며 대합실 안으로 뛰어 들어온다. 난롯불 쬐며 시린 손 녹이다 말고 힐끔, 벽시계를 올려다본다. 아차, 늦었다 싶은지 잽싸게 매점으로 달려가 기사님 몫까지 베지밀 두 병을 사 들고 온다. 벌써 버스 출발 시간이 되었나 보다. 따뜻한 베지밀 식을라 가슴에 꼭 안고 버스를 향해 뛰어간다. 가다 말고 뒤돌아서 쭈볏쭈볏 서 있는 내 쪽을 향해 손 흔들어 보이며 멀어진다.
나는 그 후로도 한참을 대합실에 그대로 앉아 있다. 조용필의 노래 <친구> 한 소절을 가만가만 속으로 읊조려 본다.
친구여~ 모습은 어딜 갔나. 그리운 친구여~
그날 밤 한옥마을 부근 호텔에서 묵고 다음 날 눈뜨자마자 덕진공원으로 향했다. 동틀 무렵 이른 시간이라 산책 나온 몇몇 사람뿐이다. 호젓한 호수 둘레를 스무 살 영임이와 예순 살 영임이가 나란히 걸으며 두런두런 이야기 나눈다.
“내가 너무 늦게 왔지?” 예순 살 영임이가 먼저 말 꺼낸다.
"학교 선생님이 됐어?" 스무 살 영임이가 묻는다.
"응~." 예순 살 영임이가 답한다.
"잘 컸네. 잘 커 주어서 고마워~.” 스무 살 영임이가 말한다.
“미안해. 너를 너무 힘들게 해서. 이 말하러 왔어.” 예순 살 영임이가 고백하듯 말한다.
스무 살 영임이가 아무 말없이 고개만 끄덕끄덕, 가만히 웃는다.
이렇게 만나니까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