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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도 잘해요

#다락방 #충전 #외로움 #혼자

by 노영임


꼭 해보고 싶은 게 뭐야?


퇴직한 이후에 뭐 하고 싶으냐? 누가 묻는다면 일단 해외여행 떠나기, 제주도 한 달 살기, 조조영화 보기, 카페 창가 앉아 멍 때리기, 멜로드라마 몰아보기, 기차 타고 훌쩍 떠나기, 책 실컷 읽기…. 등등등 손가락, 발가락을 다 동원해도 모자랄 것이다. 아니 꼭 해보고 싶은 것, 못 해 본 것 포함해서 A4용지 몇 장이라도 줄이 늘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꼭! 하나만!" 묻는다면 '혼자 있고 싶다' 말할 것이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 오롯이 나를 위하여 온전히 즐기기로 한다면 '혼자'만 한 게 있을까?





시부모님과 함께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거실을 중심에 두고 ㄷ자로 마주한 방문은 격자무늬 창호지문이다. 안방에 아버님 기침 소리는 물론 베개 돌아 눕는 기척까지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러니 건넌방인 내 방에서 옷 벗는 소리도 다 들리지 않을까? 늘 조심스러웠다. "에미야!" 부르면 언제든 "네~"하고 달려가야 한다. 집안 어디에도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 없다. 어디, 허름한 여관방이라도 좋겠다. 먹지 않아도 좋다. 커튼도 걷지 않은 채 어둑 컴컴한 방에서 한 3일 정도만 혼자 지낼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듯했다.

지금이야 시부모님도 세상을 떠나셨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났다. 화장실에 드레스룸까지 갖춰진 내 방도 있다. 그런데도 그때 그 바람은 채워지지 않은 미진함로 남아 있는가 보다.





나는 '소굴'이 필요한 인간이다.

기어들어가 가만히 웅크리고 있을 어둑 컴컴한 소굴 말이다. 어렸을 때 밖에서 울상이 되어 들어왔을 때 "왜 그래? 누가 그랬어?" 구 중 누군가 들어주면 기어이 "와앙~" 울음보 터지기 십상이다. 애써 눌러둔 눈물주머니 터지듯 말이다. 난 그냥 좀 혼자만의 시간을 주면 된다. 속상한 일이 있거나 슬픈 일을 겪을 때 저 혼자 삭힐 건 삭혀가며 제풀에 풀어져야 한다. 바람이 스쳐 지나듯 좀 기다려주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새로운 근무지로 발령 나면 슬슬 소굴을 찾아다닌다. 학교에서는 주로 도서관이었다. 일부러라도 도서업무를 자청하여 수업이 없는 빈 강의 시간에는 주로 여기서 머무는 편이다. 교육청이나 연수원에서 찾아낸 곳은 강당이나 회의실이다. 상시 사용하는 곳이 아니라 이만한 공간이 없다. 불 켜지 않은 채 영화관처럼 어두운 곳에서 혼자 눈감고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한 마디로 핸드폰처럼 배터리 충전 중이다.


가장 인상 깊은 공간은 '다락방'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집에서 독립하기까지 어린 시절 기억을 다 통틀어봐도 내 방은 없었다. 온 식구가 단칸방에서 살다가 방 2칸 집으로 옮기면 방 하나는 부모님이, 나머지 방 하나에 언니, 남동생, 나 그렇게 삼 남매가 같이 지내며 지지고 볶는다. 한 공간에 한정된 산소를 나누어 마시는 것처럼 답답했다. 제발 소원이 방 많은 집으로 이사 가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찾아낸 막힌 소굴이 있다. 부엌 위 공간으로 창고처럼 쓰이던 다락방이다. 층고가 낮아 머리를 수그리고 다녀야만 했다. 더구나 한가운데 가로지른 대들보가 있어 아차, 했다가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텅! 텅! 머리통 부딪히기 일쑤다. 열심히 공부했어도 성적이 썩 좋지 않은 건 분명 그때 받은 충격으로 뇌세포 상당수가 죽은 탓일 것이다. 이 다락방에서 '안네의 일기'를 읽으며 나도 비밀일기를 썼다. 책장 뒤 숨겨진 방에서 지내던 '안네 프랑크'가 된 것처럼 의연한 척하기도 했다. 짝사랑했던 교회오빠와 헤어진 아픔 온전히 혼자 누렸다. 무엇보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으면서 배 깔고 엎드려 만화책 읽는 맛이란 끝내주지 않는가.


방 많은 집으로 이사해도 내 방은 없다.

내가 대학을 들어가자 우리는 고향 집을 정리하여 청주로 이사를 했다. 동시에 '뭐 해서 먹고살까?' 고민하시던 엄마는 집안일과 밥 하는 것에는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하숙집으로 생계를 꾸리기로 했다. 시골집을 처분한 돈으로 대학교 근처 방 많이 딸린 집을 전세로 구했다. 그러나 방이 예닐 곱이나 되지만 내 방은 없다. 하숙집이니 방 하나가 다 돈이다. 한 명이라도 더 들여야 한다. 혼자 방 차지를 할 수 없는 노릇이라 대학교 다니는 다 큰 여자가 엄마랑 한 방을 써야만 했다. 하숙집이다 보니 늘 남학생들이 우굴거렸고 불쑥불쑥 방문 열고 들어오는 것이 여간 불편하지 않다. 어디 혼자 있을만한 곳이 없을까?

드디어 찾았다. 2층 계단 아래 창고다. 창문 하나 없어 실금 같은 불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방이었다. 내 소굴로 픽! 했다. 누울 수는 없지만 벽에 기대앉아 다리 뻗고 책 읽을 수 있는 정도 공간이다. 하숙집이라 산더미처럼 쌓인 저녁 설거지가 끝나면 그 창고방으로 숨어든다. 나만 들릴 정도로 라디오 소리도 낮게 죽여놓고, 맥심 커피 한 잔 마시며 밤새 꼼질꼼질 나만의 시간을 보낸다. 누구도 그 안에 사람이 있다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충전 중이야.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외로움이다.

퇴직하고 직장 떠나, 나이 먹어갈수록 끈 떨어진 뒤웅박처럼 혼자 남겨질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약간의 수정을 해야겠다. 여럿이 함께 있다고 외롭지 않은 것은 아니더라. 결혼해서 같이 산다고 외로움이 없으랴. 오히려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느끼는 외로움은 어떤 기대감 때문인지 "이거 뭐지?" 싶은 게 고약하기 짝이 없다.

혼자서도 잘해요! 여섯 살짜리 딩동댕 유치원 아이들 이야기가 아니다. 60살 넘어 내가 부를 노래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잘하는 것 중 하나가 '혼자서도 나름 잘 논다.'는 것이다.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 불편한 법이지 혼자 있을 때 불편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혼자 이어폰 꽂고 음악 들으며 무심천이나 산성길 걷자, 카페 창가 자리 앉아 커피 홀짝거리며 책 읽자. 슬픈 영화는 남 눈치 보지 말고 콧물 팽! 풀어가며 혼자 보자. 당연히 멍 때리기 같은 건 혼자가 딱이지.

어쩜 혼자라서 더 좋다. 혼자라서 더 편하다. 오롯이 내가 나를 위해서만 생각해도 좋고, 내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누가 뭐랄까. 아무도 나를 귀찮게 하지 않는 그야말로 '내 인생의 황금기'가 도래하는 것이다.





누구를 기다리는 걸까?

카페 창가 자리에 앉아 책 읽다가 무심코 고개 든다. 테이블 저 건너편에 내 나이에서 다섯 살 정도 연하인듯한 중년 남자가 눈에 띈다. 나처럼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가 보다. 딴짓하듯 다시 한번 슬쩍 엿보다가 딱, 눈이 마주친다. '머, 저 사람이 나를 보고 있었나봐.' 흠칫 놀라 얼른 시선을 찻잔으로 내려놓는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커피잔 들어 천천히 한 모금 마시는 시늉을 한다. 대각선 저편이라 보일 턱이 없지만 그윽한 눈빛으로 창밖을 본다. 약간은 우수에 찬 듯한 실루엣이 그럴싸해 보이지 않을까?

그만!

외치듯 핸드폰 벨이 울린다. “왜 이리 늦어. 얼른 와! 혼자 있으니까 지루해 죽겠네.” 남자가 핸드폰에 대고 소리친다. 경박스럽기 짝이 없는 목소리다. 아, 깬다. 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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